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수위권 (문단 편집) === 마태오 복음서 === ||<-2> [[https://www.academic-bible.com/en/bible/NA28/MAT.16|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 || ||<-2> '''^^18^^κἀγὼ δέ σοι λέγω ὅτι σὺ εἶ Πέτρος, καὶ ἐπὶ ταύτῃ τῇ πέτρᾳ οἰκοδομήσω μου τὴν ἐκκλησίαν καὶ πύλαι ᾅδου οὐ κατισχύσουσιν αὐτῆς. ^^19^^δώσω σοι τὰς κλεῖδας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ῶν οὐρανῶν, καὶ ὃ ἐὰν δήσῃς ἐπὶ τῆς γῆς ἔσται δεδεμένο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καὶ ὃ ἐὰν λύσῃς ἐπὶ τῆς γῆς ἔσται λελυμένο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18^^κἀγὼ δέ σοι λέγω ὅτι σὺ εἶ Πέτρος, καὶ ἐπὶ ταύτῃ τῇ πέτρᾳ οἰκοδομήσω μου τὴν ἐκκλησίαν καὶ πύλαι ᾅδου οὐ κατισχύσουσιν αὐτῆς. ^^19^^δώσω σοι τὰς κλεῖδας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ῶν οὐρανῶν, καὶ ὃ ἐὰν δήσῃς ἐπὶ τῆς γῆς ἔσται δεδεμένο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καὶ ὃ ἐὰν λύσῃς ἐπὶ τῆς γῆς ἔσται λελυμένο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 ||^^18^^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8^^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 [[https://bible.cbck.or.kr/Knbnotes/Bible/Mt/16|가톨릭 새번역]] || [[http://www.holybible.or.kr/B_SAENEW/cgi/bibleftxt.php?VR=2&CI=10256&CV=99|개신교 새번역]] || [[가톨릭교회]]는 이것을 [[교황]]수위권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적 근거 중 하나로 말한다.[* 이것은 교부 테르툴리아노(약 155년~약 230년)가 가장 먼저 교황의 권위에 대해 말하며 인용했다. 교황 중에서 가장 먼저 이 부분을 언급하며 자신의 수위권을 말한 사람은 성 스테파노 1세(재위: 254년 5월 12일 ~ 257년 8월 2일)] 현대의 가톨릭 성서학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태오는 복음서 저자들 중 유일하게 교회론적 구상을 펼쳐 보일 뿐 아니라, 비록 두 번뿐이지만(16,18; 18,17) 명시적으로 교회(ἐκκλησία)라는 낱말도 사용한다. 두 차례 중 한 번은 메시아의 보편적 교회를 가리키고, 다른 한 번은 지역 공동체를 지칭한다. 교회는 미래에, 다시 말해 부활 이후 상황에서 갱겨나고 건설될 것이다. 이 적절한 시기가 엄격히 규정되어 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οἰκοδομήσο).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교회 창설 말씀'과 시몬이 예수에게 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의 결부다. 하늘 아버지의 계시에 힘입은 이 고백은 메시아 교회 안에서 모든 고백자를 결합시킨다. 이것은 합당한 고백인데, 그 제자가 행복하다는 엄숙한 선언에 의해서도 그런 고백으로 명시된다.[* (책 속 주석) 1,17에 들어 있는 행복 선언 양식의 특징: C.KÄHLER, ZUR Form- und Traditions-geschichte von Mt 16,17-19: ''NTS'' 23 (1977) 36-58.] 에클레시아(교회)라는 개념은, 원 그리스도교의 신학 언어에 이미 주어져 있었고 특히 바오로가 자주 사용했거니와, 유다교 회당과의 경계 설정을 나타내는 데 적절했다. 마태오에게 에클레시아의 바탕은 신앙고백이지, (바오로에게는 추가적이되 중요했던) 율법에 대한 다른 입장이 아니다. 베드로는 합당한 신앙고백을 했을 뿐 아니라, 예수에 의해 세워져야 할 교회 안에서의 바위(반석) 구실도 떠맡았다. 전통적 표상 자료 안에서 바위에게는 이중 임무 ― 건물의 기초 바위 그리고 위협적인 '저승의 세력'의 폐쇄 바위가 되는 것 ― 가 귀속된다. 시몬은 온 인격으로 바위이니, 그가 고백한 믿음이 바위 구실을 넘겨받는게 아니다. 여기서는 개념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한 인간에 관해 말하고 있다. 견줄 만한 것으로 성전 바위에 관한 유다교의 사색을 들 수 있는데, 이 바위는 거기로부터 세상이 창조되었고 또 재앙의 권세들을 저지하는 지점으로 여겨졌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우두머리 조상들이 이 바위와 동일시될 수 있었다.[* (책 속 주석) 참조: J. JEREMIAS, ''Golgotha (Angelos 1)''(Leipzig 1926) 74-75.54ff; G. KLINZING, ''Die Umdeutung des Kultus in der Qumrangemeinde und im NT'' (Stunt 7) (Göttingen 1971) 206 Anm. 30 und 31.] 바위인 시몬 위에 세워진 교회는 저승의 세력들에 대항할 수 있다. 이것은 종말 시기의 교회다. 이 약속은 전투적이다. 우리는 이 약속에 교회에 속한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라는 확언[* (책 속 주석)TRILLING(''ISRAEL'' 162)의 견해다.]보다는, 그들의 실존과 세상 시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주어질 그들의 주님 그리스도의 보호가 표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8,20ㄴ 참조). 시몬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르침의 보증(인)으로서의 바위다. 그래서 그는 책임을 지고 매고 풀 수 있다(16,19). 그는 처음으로 부름 받은 자요(4,18; 10,2) 예수를 알아보는 계시를 선사받은 자다. 그 옛날 엘야킴에게 그랬듯이(이사 22,22 참조), 베드로에게 열쇠 권한 ― 물론 하늘 나라에 관한 ― 이 넘겨졌다. 이 전권이 인간에게, 제자 시몬에게 유일회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주어졌다. 이 전권의 계승에 관해 마태오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18,18에 따르면, 메고 푸는 권한이 교회 안에서 계속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분도출판사, 2014, 244-245p >이렇게 예수의 생애와 활동은 더 큰 구도 속에 엮여 들었고, 이 구도로 시야는 눈에 띄게 넓어졌다. 마태오가 예수 이야기를 부활 후의 전망에서 서술하는 경향은 마르코보다 더 뚜렷하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케리그마적' 그리스도와 결합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삶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에 따르면 예수께서 교회("나의 교회")의 기초를 놓으셨고, 반석인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마태 16,18; 참조: 18,17). 당신 교회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론적 인식이 이 복음서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에, 이 복음서를 '교회적' 복음서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분도출판사 2009, 145쪽 물론 이 발언에 "파스카 이후 교회의 자기 이해가 소급된 것인가"의 여부는 당연히 물어야 하며, 가톨릭 주석학에서도 당연히 이 질문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전략)이 삽입부분은 마태오가 수집한 것인데, 한때는 다른 배경에 속했던 자료를 여기에 삽입시킨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 자료를 수집한 것은 마태오가 아니고 전-마태오이며, 실제로 16,16b~19이 하나의 묶음으로 마태오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전-마태오의 배경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후-부활이라는 학설이 우세한데'''(후략) >---- >-강한수, 「교회 안에서의 가르치는 권위와 무류성-미국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의 교회일치 대화(1980)에 대한 신학적 배경 연구」,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신학박사 학위논문, 2013, 66p 그러나 이 발언을 설령 예수의 역사적 발언이 아니라고 보더라도, 파스카 이후의 교회가 자기 자신을 그렇게 이해했으며, 그것이 정경 복음서인 마태오 복음서에서 표현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요한 복음서가 공관 복음서보다 '역사적 예수'와 거리가 있다고 해서 요한 복음서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수위권 교의의 합법상'이라는 면에서는 역사적 예수의 발언인가를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개신교에서 제기하는 가장 통상적인 반론은, 마태 16,18-19에서 말하는 반석(바위)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사도들이 공유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거나 혹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석학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반론은 지나치게 교파적이고 편협한 반박이다. W.F. Albright와 C.S.Mann의 앵커바이블 주해에서도, "마태오 16장의 바위는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이다"라는 식의 해석에 대하여, 분명한 증거를 무시하는 교파적인 해석에 불과하다며 일축하고 있다. >''Rock''(Aram. ''Kēphā''). This is not a name, but an appellation and a play on words. There is no evidence of Peter or Kephas as a name before Christian TImes. On building on a rock, or from a rock, cf. Isa li 1 ff.; Matt vii 24 f. ''Peter as Rock'' will be the foundation of the future community {{{-2 (cf. ''I will build'')}}}. Jesus, not quoting the OT, here uses Aramaic, not Hebrew, and so uses the only Aramaic word which would serve his purpose. >'''In this view of the backgrond of vs. 19, one must dismiss as confessional interpretation any attempt to see ''this rock'' as meaning the faith, or the Messianic confession, of Peter. To deny the pre-eminent posotion of Peter among the disciples or in the early Christian community is a denial of the evidences.''' Cf. in this gospel x 2, xiv 28-31, xv 15. The interest in Peter's failures and vacillation does not detract from this pre-eminence; rather, it emphasizes it. Had peter been a lesser figure his behavior would been of less consequence {{{-2 cf. Gal ii 11 ff.)}}}. >{{{[}}}''바위''([[아람어]]. ''Kēphā''). 이것은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며 언어유희이다. 베드로 혹은 케파가 그리스도교 시대 전에 이름으로 쓰였다는 증거는 없다. 바위 위에, 혹은 바위로부터 건설을 하는 것에서 {{{-2 (cf. 이사 51,1 ff.; 마태 7,24 f.)}}} ''바위로서의 베드로''는 미래 공동체의 기반이 될 것이다{{{-2 (cf. ''내가 ... 세울 터'')}}}. 예수는 구약을 인용하지 않고 여기서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를 사용하는데, 그렇게 그의 목적에 봉사하는 유일한 아람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19절을 볼 때는 어떠한 교파적 해석도 떨쳐버려야만 한다. ''이 바위''가 베드로의 믿음라느니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라느니 하는 시도를 떨쳐버려아만 한다. 베드로가 제자단 또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에서 가진 탁월한 포지션을 부정하는 것은, 증거를 부정하는 것이다.'''{{{-2 (Cf. 마르 10,2; 14,28-31; 15,15.)}}} 베드로의 실패와 흔들림에 대한 관심은 이 탁월함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한다. 베드로가 덜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그의 행위는 훨씬 덜 중요했을 것이다 {{{-2 (cf. 갈라 2,11 ff.)}}}.{{{]}}} >---- >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https://www.amazon.com/Matthew-Translation-Introduction-Commentary-Anchor/dp/038508658X|《The Anchor Bible Matthew: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Doubleday & Company, Inc., 1971, p.195 >There is no passage in the gospels which has been more discussed than this, especially with reference to vss. 17-19. The general sense of the passage is indisputable. ... Jesus calls Peter fortunate, in that this knowledge has not come from human sources, but is a direct revelation from God. He goes on to assure Peter that he (Peter) is the rock on which the new community will be built, and in that community Peter's authority to "bind" or "release" will be a carrying out of decisions made in heaven. His teaching and disciplinary activities will be similarly guided by the Spirit to carry out Heaven's will. >{{{[}}}복음서들에서 여기보다, 특별히 17-19절보다 더 논쟁되어온 곳은 없다. 이 구절의 일반적인 의미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 예수께서는 이 지식이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의 직통 묵시에서 왔기에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다. 계속해서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새 공동체가 그 위에 건설될 바위라고 학언하신다. 그리고 저 공동체 안에서 베드로의 "묶거나" "푸는" 권한이 하늘의 결정으로 수행될 것이다. 그의 가르치고 규율하는 활동은 하늘의 의지를 수행하는 성령에 의해서 유사하게 인도될 것이다.{{{]}}} >----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https://www.amazon.com/Matthew-Translation-Introduction-Commentary-Anchor/dp/038508658X|《The Anchor Bible Matthew: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Doubleday & Company, Inc., 1971, pp.197-198 물론 언어적으로는 복음서가 베드로를 바위라 말하고 있더라도, 이는 오늘날 교회 전체가 공유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연루되어 있는 것은 맞는다. 이건 가톨릭 교회에서도 당연히 부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교회의 근본적인 '바위'라는 것도 당연히 가톨릭 교회가 부정하지 않는다. >복음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반석과 열쇠라는 두 가지 상징적 핵심어{{{-2 (Bildworte)}}}로 특징 지워진다. 두 단어 모두 구약에서 기원하지만 신약에서도 그 의미가 연결되는 단어로서, 복음이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님에 의해 설립된 제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우선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나 무조건 의지할 수 있는 토대라는 의미에서 특히 시편에서 빈번하게 야훼 하느님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2 ([[https://bible.cbck.or.kr/Knbnotes/Bible/Ps/62|시편 62,3]])}}}. 그분의 거룩한 말씀은 모든 것을 내걸고 의지할 수 있는 말씀일뿐더러, 그분이 사람이 되셨어도, 그러니까 인간의 구원자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어도 그러하다. "그 바위(반석)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2 ([[https://bible.cbck.or.kr/Knbnotes/Bible/1Cor/10|1코린 10,4]])}}} '''예수님이 이 '반석'을 베드로에게 적용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더 이상 반석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반석에 베드로를 참여시키는 것이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2 ([[https://bible.cbck.or.kr/Knbnotes/Bible/Mt/16|18절]])}}} >----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2 ''Hans Urs von Balthasar''}}}, 『말씀의 빛: 발타사르의 주인 강론 스케치』{{{-2 ''Licht des Wortes: Skizzen zu allen Sonntagslesungen'', 김관희 번역,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21, p.139 다시 말해서, 가톨릭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시몬이 '바위'인 것은 근본적 '바위'인 그리스도에게 참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위에서 스프리치의 책의 문장을 이미 발췌해서[* 마르코 스프리치(Msgr. Marco Sprizzi), 《앙리 드 뤼박: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BOOKK 2018, p.216.] 말했던 것처럼, 가톨릭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베드로의 권한은 피라미드 관료제의 군주 같은 의미가 아니다. 그런 교회론은 가톨릭에서도 주장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자신을 포함하여) 열두 사도가 똑같이 받게 될 그 동일한 권한을 개인적으로 받았다. …… 이러한 측면에서, 베드로는 최고 사도가 아니라, 사도단이 공유하는 모든 것을 그 안에 개인적으로 재통합하고 있는 사도로서 드러난다."''' 언어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교황권을 강조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도, 교황의 무류성을 교회의 무류성이라는 맥락에서만 보았지, 교황이 교회를 지배한다는 식의 교회론은 주장한 적이 없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마치 교황 하나만 강조한 것처럼 보인 것은, 신학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리적인{{{-2 (말 그대로 물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교회의 공동합의성 주제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미 논의되고 있었으나 [[보불전쟁]] 때문에 공의회가 조기종결되어버려 단지 교황권만 강조한 것 처럼 보인 것이다.[br][br]"교황의 수위권을 선포한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에서도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논의만큼 강력하게 토론되었던 주제가 바로 주교단이었다.^^주6)^^ 사실 가톨릭교회의 최고 권위에 대한 논의에서 교황의 권위와 주교단의 권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에 대한 교령만 선포한 상태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고(1870. 9. 20.), 이로 인해 주교와 주교단에 대한 교의가 최종 문헌의 형태로 선포될 수 없었다. 그 결과 세상에는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교의만 알려졌고, 공의회 과정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가톨릭교회는 마치 전제 군주 국가처럼 보이게 되었다."[br]{{{[}}}주6)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에서 주교단을 다룰 때, 각주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회의록에만 나오는 신학위원회의 발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헌장」 각주 28 참조. 공의회 문헌 작성에서 이렇게 공의회 최종 문헌이 아닌 회의록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주교단에 대한 교의가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얼마나 많이 논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1차 바티칸공의회와의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이기도 하다.{{{]}}}[br]최현순, 《시노달리타스》, 바오로딸, 2022, p.23] 아울러, 후대 교황들과 베드로의 계승관계는 신약에서 명시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부정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베드로의 권한이 2세대 3세대의 교회에서도 새삼 강조되었다는 점은 베드로의 직무 이야기를 단발성 일화로 축소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유럽의 가톨릭·개신교 신학자 36명의 공저인 《Neues Glaubensbuch - Der gemeinsame christliche Glaube》에서는 ㄱ. 신약에서는 베드로의 직무상 특별함이 인정되고 있다는 점 ㄴ. 베드로 직무의 계승이 직접 명시되지는 않지만, 초대교회 1세대 뿐만이 아니라 2세대와 3세대 교회에서도 베드로의 직무상 특별함이 새삼 강조되고 있으며, 따라서 베드로직의 계속성과 현존성이 베드로 개인의 죽음으로 종료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현대 주석학의 연구결과로 우리는 베드로직에 관한 문제의 객관적인 사정 자체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① 신약성서의 중요한 구절과 전승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특출한 지위에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구절과 전승이이 발생한 것은 장소적으로나 연대상으로나 다양하며 , 사실상 신약성서가 발생한 모든 시대에 해당된다. >② 베드로의 특별한 지위는 그가 모범적인 제자라는 것만이 아니라 마태오 16,18에 의하면 <직무상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 이렇게 그에게 위임되고 그에 의하여 보증된 예수의 가르침은 지상의 온 교회에 대하여 유효하고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선언된다 . 베드로의 결정에 따라 하늘에서 도’ 즉 최후심판에 있어서도 결정이 내려진다"[* (책 속 주석) G. Bornkamm, ''Geschichte und Glaube II'' (München 1971) 37-50, 특히 47]. 베드로에게는 가르치고 지도하는 권한이 하나의 통일 원리로 부여되어 있다 . 그는 " 예수의 가르침의 보증인이며 권위 있는 해석자"이다.[* (책 속 주석) Ebd. 49. Vgl. auch R. Hummel, ''Die Auseinandersetzung zwischen Kirche und Judentum im Matthäusevangelium'' (München 1963) 61ff.] >③ 가톨릭 신학이 난점으로서 인정해야 할 것은 신약성서에 베드로 직무기능의 계승에 대하여 명언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동시에 거꾸로 보면 그런 계승자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이 문제는 역사상 단 한번 베드로에게 맡겨진 유일한 직분 문제일 뿐이며 베드로 자신이 죽음으로서 그의 〈직무〉 기능도 사라졌다는 것 역시 단정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다. 신약성서 자체에서도 분명히 알아 볼 수 있둣이 베드로에 관한 전통들은 비단 교회 창설기에만 (예컨대 사도로서의 직무와 관련해서) 의의와 타탕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상 교회 창설기 후의 제2·제3 세대에도 〈베드로〉의 〈직무상의〉 중요성이 새삼 긍정되었다. 에컨대 요한 21과, 베드로의 이름으로 (그러나 후대에) 교회 내에서 회람되던 두 편지가 이를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이미 신약성서 내에서도 〈베드로직〉의 계속성과 현존성 문제가 존재했다."[* (책 속 주석) W. Trilling, Zum Petrusamt im Neuen Testament, in: Theol. Quartalschrift (Tübingen) 151 (1971) 110-133, 특히 133.] >---- >-Johannes Feiner - Lukas Vischer 등 공저, 《새로운 공동신앙 고백서 - 하나인 믿음》{{{-2 ''[[https://www.amazon.com/Neues-Glaubensbuch-gemeinsame-christliche-Glaube/dp/B0024D63HA|Neues Glaubensbuch - Der gemeinsame christliche Glaube]]''}}}, 이경우·정한교 번역, 분도출판사 1979, p.615[* 해당 부분은 가톨릭의 Karl Lehmann이 초고를 저술하고 개신교의 Heinrich Ott가 감수했다. 여기서 감수의 원칙은, 가톨릭 신자로서 혹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로서 "이 텍스트에 찬성을 해도 나는 역시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라 할 수 있을까?"{{{-2 (본서 27쪽)}}}이다.] 종합해서, 현대적인 성서주석학 및 일치 대화들의 시선에 의거하여,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마태 16,18-19에서 바위(반석)는 분명하게 시몬을 가리킨다. 2. 교회의 근본적 바위는 분명하게 그리스도이다. 3. 신약은 베드로와 후대 교황의 계승관계를 명시하지 않지만, 베드로 직무는 2세대, 3세대 교회에서도 새삼 강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