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수위권 (문단 편집) ==== 그 외 ==== 레오 이후에도 성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한 수위권에 대한 의식은 보다 분명해졌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펠라기우스의 추종자들을 거슬러 싸우는데 열의를 갖고 로마의 승인을 얻으려 했다. 왜냐하면 오직 이 사도좌(Sedes Apostolica)의 의견 표명과 더불어 아프리카 주교들의 결정에 대해 참으로 함께 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 뤼박(De Lubac)이 언급하는 것처럼, 당시 어떤 규율이나 가르침에 관한 중요한 사안의 최종적인 해결 방법은 사도좌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이들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아프리카 교회에서 이단적인 가르침을 거슬러 싸워야 했다. 그래서 그는 친히 카르타고 공의회(418년)와 밀레비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대다수의 주교들과 함께 인노첸시오 교황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간은 밀도 있는 장문의 소송 사건을 다룬 청원서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교황의 승인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해 드 뤼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의 공동체적 의무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로마의 개입이 이 위태로운 담판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히 보았다. 로마가 자신의 판단을 주지 않는 동안, 문제는 계속 미해결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중략)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노는 로마가 아니라면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후대에도 교황권은 여러 기회에 동방의 문제에 개입되었다. 교황 호르미다스(Hormidas)의 신앙고백은 250명의 동방주교들의 수용과 함께 아카치아누스 이교(484-519)를 끝맺었다. 그리고 868-87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한 이들 모두는 호르미다스의 양식과 아주 유사한 "libellus satisfactionis"에 서명해야 했다. 우리는 [[단의론]] 위기 당시 예루살렘의 성 소프로니오와 고백자 성 막시모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인 요한이 교황의 수위권을 위해 증언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교황권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로마의 주교인 교황은 베드로의 권위와 유사한 권위를 갖는 그의 계승자라는 의식이 보다 분명하게 발전되어 갔다. 사실 대 레오 교황의 입장은 이를 명백히 입증한다. 그리고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로마교회가 제시하는 기준은 중대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상술했다시피 빅토르 교황은 파문까지도 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소아시아 교회를 위협했다.] 특히 에페소 공의회의 사례에서 보듯, 동서 분열 이전의 [[세계공의회]]는 (먼저 개최하고 승인을 받을지언정) 어떻게든 명목상으로는 교황의 승인을 필요로 하였다. 정교회 역시도 가톨릭과 보편교회의 역사를 공유하므로 교회의 수장으로써 로마 주교의 역사적 우위는 인정한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때때로 로마 주교의 권위에 기대기도 하였으니 로마 주교가 주교들 중에서 으뜸이라는 것도 당연히 인정한다. 즉 이 논쟁의 당사자인 가톨릭과 정교회는 둘 다 '로마 주교가 가진 어떤 우위성' 자체는 인정하는 것이다. 즉, 정교회 측이 위에서 주장한 교황은 '실권 없는 명예직' 설은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 이럴 수 밖에 없는게 처음부터 --교황 생까고 나간-- 보편 교회에서 나간 소아시아 교회들이나, 나중에 교황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고 떨어져 나간 개신교와 다르게 정교회는 가톨릭과 보편 교회의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인정했던 로마 주교, 즉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기 굉장히 어렵다.] 이러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는 9세기에 있었던 포티오스 분열 당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서 오갔던 교회정치적 관계를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자기 내부의 교회정치적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서 분명히 로마의 권위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에서 나온 갈등 봉합의 결론을 인정하는 것 외에 달리 뭘 하지는 못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 교회정치의 승자가 된 포티오스[* 포티오스는 [[필리오퀘 논쟁]]에서 라틴 신학을 공격한 장본인이다.]에게 불만을 품고도 최후의 승자로 그를 인정하였다. >당시 상황은 매우 기묘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자기 내부의 갈등들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가 필요했고, 사실 로마의 권위는 매우 강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로마의 권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 권력투쟁의 결과를 그대로 인정해 주는 외에 달리 행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사실 로마는 무엇인가 달리 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 >-Klaus Schatz, 《보편공의회사》, 분도출판사 2005, 124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