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수위권 (문단 편집) ==== [[클레멘스 1세]]와 초기 로마 교회 ==== 기원후 96~98년 사이에 코린토 교회에 분열이 일어났을 때[* 이 분열의 원인은 사도들로부터 적법하게 서품받은 사제들을 코린토 신자들이 멋대로 쫓아내려는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코린토 교회의 관계자들은 그 중재를 위해서 로마 주교 [[클레멘스 1세]]를 찾아갔다. 이에 클레멘스 1세는 사도교부 문헌 중 중요한 두 작품 중 하나인 로마 주교 클레멘스 1세의 「코린토 교회에 보내는 편지」(Κλήμεντος πρὸς Κορινθίους)를 써주었고, 그로 인해 코린토 교회의 분열은 중지되고, 그 서간은 2세기 내내 정경처럼 받들여져서 필사되고 소아시아 지역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읽혀졌다. 이것은 교황의 수위권을 보여주는 역사적 문서에 남아있는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1)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 닥친 갑작스럽고 연이은 재난과 역경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이 바라는 문제와, 소수의 경솔하고 대담한 사람들이 그토록 무례하게 일으킨 ... 불경하고 가증스러운 소요에 너무 늦게 주의를 기울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명예롭고 빛나는 이름이 ... 크게 모욕을 당할 정도가 되어서 ... 우리는 여러분의 의무를 상기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 >(57) 그러므로 소요의 기초를 놓은 여러분은 순명으로 원로들에게 순종하고 참회를 위해 징계를 받으십시오... > >(59)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들이 그분[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스스로 적지 않은 불운과 위험에 말려들게 될 것임을 알게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이 죄에 대해서는 탓이 없을 것입니다... > >(63) 사실 여러분이 우리가 성령으로 기록한 것에 순종하고 이 편지로 우리가 평화와 화합을 위해 권장하는 대로 정당치 못한 질투에 전념하는 것을 끊어버린다면, 여러분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것입니다. >---- >-[[클레멘스 1세]], 「코린토 교회에 보내는 서간」[* 콘라드 키르흐{{{-2 ''Konrad Kirch S.I.''}}}, 《고대 교회사 사료 편람》{{{-2 ''Enchiridion fontium historiae ecclesiasticae antiquae quod in usum scholarum collegit''}}}, 황치헌 번역,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23, p.81.] 만약 로마 주교의 수위권이 없다고 생각하면 [[예수]]를 직접 보고, 예수로부터 직접 뽑혔으며, 예수와 함께 생활했으며, 예수의 직접적인 증인인 [[사도 요한]]이 당연히 더 큰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중재를 청해야 했을 것인데 코린토 교회 신자들은 요한이 아니라 클레멘스에게 중재를 청했다. 물론 사도 요한이 정말로 그때 살아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또다른 역사학적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이 편지의 작성 시기에는 베드로와 바울로를 직접 보고 교류한 사람들이 멀쩡히 살아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1세대 사도에게 교육 받은 교회들 사이에서 로마 교회의 특별한 지위가 편지 안에서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개신교의 반박은 이러하다. 당시 코린트는 로마의 관습과 로마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받았다. 여러 면에서 고린도 인들은 헬라 땅에 사는 로마의 임시숙소 (pied-a-terre)와 같으며, 로마에 살던 기독교인들 역시 자신을 고린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느꼈다. 학자들은 로마와 코린트는 좋은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것은 1세기 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본문에서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와의 관계를 동일한 경주장에 있으며, 동일한 싸움을 하고 있다 (클7:1)고 말하였으며 '우리' 라는 말을 매우 강조하여 7장에만 '우리'라는 말을 무려 8회나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해당 서신은 교황의 수위권보다는 고린토 교회와 로마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특별한 우애적인 관계임을 반영하는 표시로 해석가능하다.[* 이상 내용은 황명길,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서신의 신학과 교회사적 위치에 관한 연구」, 2008 의 내용을 발췌하였음] 그리고 클레멘스는 위에서 강조 표시한 것과 같이 해당 서신에서 자신들의 뜻을 교도권에 따른 지시가 아닌 간청의 형식으로 표현하였으며, 자신의 가르침이 성령이 명한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로마교회만이 행사하는 권위가 아니었다. >^^1^^제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에 큰 소리로, 곧 '''하느님의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말에 따라 주교와 원로단 그리고 봉사자들을 존중하십시오. >^^2^^제가 몇몇 사람드링 분열할 것을 예견하고서 이렇게 충고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서슬에 묶이게 하신 그분께서 증언하시거니와 제가 사람들을 통해서 이를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소리 높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교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성전으로 여겨 보호사십시오. 일치를 추구하십시오. 분열들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닮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 〈필라델피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7,1-2[* 안티 또한 해당문서에서 저자는 어느 구절에서도 자신을 로마의 주교라고 명확히 밝히지 않으며 로마의 주교라고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은 이레네오이다. >이 서한을 쓰게 된 계기는 코린토 공동체에서 몇몇 신부가 부당하게 직무를 박탈당해 일어난 소요 때문이었다. 이 본문은 로마 교회가 다른 지역 교회를 걱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증언으로는 가장 일찍 쓰인 것이다. 저자는 어느 구절에서도 로마의 주교라고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로마의 주교라고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은 이레네오이다. 저자는 로마 공동체 사제단의 최고 지도자인 것 같다. >---- >덴칭거 32p 아울러 이 편지에는 단일 주교직이나 이를 위해 반드시 따르는 관할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서신 전체에서 발송 주체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형으로 언급되며 이는 저자와 비슷한 위치의 인물이 1명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이상 문장은 'H.R. 드롭너, 『교부학』, [[분도출판사]], 2001, 119p'에서 인용]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클레멘스의 편지가 후대 교회의 법적인 수위권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단순한 '형제적 개입' 차원으로만 독해한다면, 이 서간은 이해할 수 없고 너무나 이상한 글이 되어버린다는 걸 지적한다. 그 누구도, 위에서 인용한 클레멘스의 어조가 이냐시우스의 어조와 동일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뭐니뭐니 해도 이 문헌의 중요성은 로마 교회의 수위권을 둘러싼 민감한 문제로 말미암아 가장 두드러진다. 사도 시대부터 각 지역 교회는 책임자인 주교가 관리해 온 것이 관례였는데, 로마의 주교가 무슨 권리로 멀리 발칸 반도에 있는 고린토 교회의 문제에까지 개입하게 되었는가? 이 개입의 성격은 단지 이웃 교회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동등한 지위의 교회가 ’형제’ 자격으로 행한 하나의 ’형제적 교정’(correctio fraterna)에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특별한 구속력과 책임을 지닌 어떤 권위의 행사라 할 것인가? "단일 주교직이나 이를 위해 반드시 따르는 관할권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편지를 로마 공동체의 수위권 요구에 관한 첫 증언이라는 견해는 옳지않다"(드롭너)는 지적을 무시할 순 없지만, 이 편지에 단순한 ’형제적 개입’ 차원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예컨대 '''"우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은 결코 가볍지 않은 죄와 위험에 빠진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입니다"'''{{{-2 (59,1)}}}는 표현이나 '''"우리가 성령의 감도로 적어 보내는 훈계에 순종하여 여러분이 시기의 불의한 분노를 근절한다면,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2 (63,2)}}}는 표현 말이다. 한 마디로, 이 편지가 엄격하고 법적인 의미에서 로마 수위권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바티폴)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헌이 지닌 단호하고도 권위있는 말투는 로마 교회가 ’아가페’의 차원에서 다른 모든 교회들에 대해 지닌 우위성과 책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139603&acid=71|가톨릭신문, 2002년 12월 1일]], 이연학 신부(고성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또한 클레멘스 시대의 로마 지역 교회가 집단지도체제이든, 단일 주교의 지도에 있든, 그것은 교황의 수위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분명히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는 단일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하지만, 베드로와 후대 교황의 관계는 사도계승이 연결되었다는 점이 중요하지 중간에 집단지도체제가 있었느냐의 문제는 부차적일 뿐이다. 교황이 추기경단의 콘클라베로 선출된다고 해서 "단일 지도자가 없는 공백기간에 추기경들의 집단 투표에 의해서 선출되었으니 베드로의 계승자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펴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도 추기경이라는 제도부터가, 로마 지역 교회의 단체적인 직함에서 유래한 것이다. {{{-2 (현대 추기경이 바티칸과의 이중국적을 가지는 이유도, 형식적으로 추기경은 로마 지역 교회의 성직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추기경단은 전세계 가톨릭에서 권위를 인정받는다.)}}} 오히려 클레멘스 서간은 개인의 능력이나 카리스마가 아닌 '우리', 곧 '로마 교회'라는 제도적인 단위를 성령의 영감과 연결하고 있다는 점은 로마의 수위권을 함축한다. 로마 교회가 수위권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가톨릭측에서만 주장하는 교파적인 견해가 아니다. 루터교 신학자인 [[https://en.wikipedia.org/wiki/Adolf_von_Harnack|Adolf von Harnack]]는 초기 로마교회가 실질적 수위권을 지녔다고 해석하고 있다. >From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the Roman church was in a position of practical primacy over Christendom. It had gained this position as the church of the metropolis, as the church of Peter and Paul, as the community which had done most for the catholicizing and unification of the churches, and above all as the church which was not only vigilant and alert but ready[* (책 속 주석)Evidence is forthcoming from the second and the third centuries, for Corinth, Arabia, Cappadocia, and Mesopotamia (cp. above, pp. 157, 185, 376; and below, Book IV.). In a still larger number of cases Rome intervened with her advice and opinion.] to aid any poor or suffering church throughout the empire with gifts.[* (책 속 주석)A considerable amount of the relevant material is collected in my History of Dogma, I. pp. 455 f. (Eng. trans., vol. ii. pp.149-168), under the title of “Catholic and Roman.”] >{{{[}}}1세기 말부터 로마교회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실질적 수위권이 있었다. 로마교회는 메트로폴리스의 교회로서, 베드로와 바오로의 교회로서, 교회들을 가톨릭화하고 통일하는데 최고로 활동하는 공동체로서, 무엇보다도 경계하고 경고할 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어떤 가난하고 교통받는 교회든 기부로 돕는 교회라는 점에서 이 위치를 얻었다.{{{]}}} >---- >-Adolf von Harnack, ''[[https://www.ccel.org/ccel/harnack/mission.html|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 원제: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James Moffatt 옮김 (Grand Rapids, MI: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395쪽 해당 책을 언급하며 가톨릭측 교회사 학자인 [[https://de.wikipedia.org/wiki/Ernst_Dassmann|Ernst Dassmann]]은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도교화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코르넬리우스 주교는 로마에서 노바티아누스를 단죄하기 위해 '60명의 주교와 이보다 더 많은 사제와 부제가 참석한 대규모의 교회회의'가 열렸다고 전한다. 그는, 로마에서 열린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결의 사항에 동의한 주교들의 이름과 교회도 보고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에는 백 명 또는 그 이상의 주교 공동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6,43,1.21-22 참조).[* (책 속 주석)A. VON HARNACK,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Leipzig{ }^{4}1924) 807.] >로마는 매우 일찍이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우위를 차지했다. 네로 황제 치하에서 처음으로 매우 혹독한 박해를 겪은 로마 공동체는, 『클레멘스의 첫째 편지』가 입증하듯이 빨리 복구되었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박해들로도 약화되지 않았다. 로마 공동체는 1세기 말부터 전 그리스도인에게 '실질적인 수위권'을 지녔다.[* (책 속 주석) VON HARNACK, ''Mission'' 487.]로마 공동체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세운 공동체로 여겨졌으며 곧바로 교회 신앙의 규범이 되었다. 2세기에 전통 신앙과 이단을 정확히 구분하기 시작했다면, 이는 특히 로마인들이 지닌 신앙의 척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사도신경」과 주교들의 '사도 계승'{{{-2 successio apostolica}}}에 대한 고증은 로마 관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공동체는 신앙을 실질적으로 전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것 같지 않다. 로마는 곧바로 교회의 중심이 되었지만 선교의 중심은 아니었다. 로마 공동체의 매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2세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로마로 여행한 전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들의 목록, 곧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이레네우스, 헤게시푸스,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 아베르키우스, 마르키온, 발렌티누스, 사벨리우스, 테오도투스를 한 번이라도 상기해야 한다.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로마에 도움을 청했고, 로마는 조언뿐 아니라 능력에 따라 물질적 원조도 했다. 코린토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여러분에게는 모든 형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고 모든 도시에 있는 많은 공동체에 기부금을 보내는 관습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로마인인 여러분은 전승된 로마 관습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예부터 보낸 희사금으로 곤궁한 이들의 가난을 덜어 주었으며, 광산에 사는 형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주교 소테르는 이 관습을 철저히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식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하듯이 성도들뿐 아니라 (로마에) 오는 형제들에게도 (많은) 희사금을 나누어 주어 이 관습을 더 확대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4,23,10).[* (책 속 주석)번역: KRAFT 223.] > >실제로 코린토와 아라비아, 카파도키아, 메소포타미아 공동체에 행해진 기부금들은 잘 알려져 있다(381쪽 참조).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서론에서 로마는 '사랑의 연맹의 수좌'라고 쓴 표현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 배경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그나티우스는 이 낱말로 2세기 초에 로마가 재판 관할 수위권을 지니고 있다고 내세우는 것도 아니며, 원조를 받은 공동체들이 몇 세기 뒤에도 기억하고 있는 '사랑의 실천'{{{-2 caritas}}}에서 로마가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줄곧 로마로 왔으며 로마 공동체는 이들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법적·규율적으로 확정되지않은 공동체들의 관계는 대부분 이러한 방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새 공동체들의 곤경과 근심거리에 관해 들었으며, 방문자들은 유명한 로마의 사도 공동체와의 친교{{{-2 communio}}}를 진심으로 느꼈다. 그 뒤 그들이, 아마도 그들 공동체를 위한 희사금을 가지고 다시 떠나면, 로마 공동체가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사를 지내고 어떤 신앙을 고백했는지를 그들이 와보지 않고 이야기한 것보다 쉽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변두리의 소공동체들이 로마인들의 '사도적 권위'{{{-2 auctoritas apostolica}}}에 관해 들어 알고 있는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따라서 의도적이든 않은 로마의 사랑 실천 행위는 교회일치를 위해 구심력을 지니는 운동에서 과소평가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로마가 훈령을 내릴 수 있다는 권한은 아직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로마의 주교 빅토르가 양보해야 했던 부활절 논쟁에서 입증된다(277; 340쪽 참조). 로마의 권리를 요구하는 신학적·법적 강구는 이른바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와 로마의 스테파누스(254~257)의 이단자 논쟁에서 시작했다. 이 논쟁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바위)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고 한 이 말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후대의 수위권론은 오래 전부터 로마의 실제적인 우위를 인정한 것보다는 교의적으로 이 약속을 실마리로 삼았다. >----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 원제: ''Kirchengeschichte I: Ausbreitung, Leben und Lehre der Kirche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410-412쪽 비슷하게, 역사학자 [[https://en.wikipedia.org/wiki/Jeffrey_Burton_Russell|Jeffrey Burton Russell]]은 Harnack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 slow growth of papal influence began no later than ca. 95, when the church of Rome intervened to settle a dispute at Corinth, and as the Protestant historian Harnack observed, "From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the Roman church was in a position of practical primacy over Christendom." >{{{[}}}교황의 영향력의 느린 성장은 늦어도 기원후 95년에 시작되었다. 이때 로마교회는 코린토의 논쟁을 해결하는 데 개입하였다. 개신교 역사가 Harnack이 관찰했듯이, "1세기 말부터 로마교회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실질적 수위권이 있었다."{{{]}}} >---- >-[[https://en.wikipedia.org/wiki/Jeffrey_Burton_Russell|Jeffrey Burton Russell]], 《Medieval Civilization》,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5, p.69 또한, 한스 큉에 의하면 적어도 로마와 베드로의 관계성은 부인하기 어렵다.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늦게 잡아도 레오 1세 때에 교회 운영의 수위권에 대한 로마의 주장이 ― 언제나 바로 동방에서 그것을 인정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은 어떻든간에 ― 확립되고 명시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머물렀고 거기서 순교했다는 것도 최근 가톨릭·비가톨릭을 막론하고 갈수록 많은 사학자들이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바티칸 성당 아래의 베드로의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가톨릭의 유능한 전문가들도 매우 회의적이다. 그러나 문헌상의 증언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클레멘스의 편지」(1,5-6)를 보면 베드로와 바울로(!)가 네로 시대에 로마에서 순교했을 개연성이 극히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베드로 전서 5,13의 "바빌론"이란 바로 로마가 아닐까?). 이 1세기 말의 로마인의 증언은 또 2세기 초의 소아시아인인 이냐시우스가 「로마에 보낸 편지」(4,3)에서도 확인된다. 95년경부터 분명하고도 이의 없이,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런 교회 정책적인 의향도 없이 고수되어 온 이 전통의 신빙성을 부인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4), 180쪽 신자 공동체, 곧 교회의 규모로 볼 경우 밀라노 칙령 이전의 로마 교회가 그리스-오리엔트 쪽보다는 소규모였을 정황이 크다. 기독교 문제로 소란스러웠던 곳은 그리스와 이집트, 소아시아 일대다. 로마 당국과 황제들에게 기독교란 동방 변경에서 등장하여 그리스 등 동방 총독들을 골치 아프게 하더니 로마 수도일대까지 들어온 배타적 종교였다. 당연히 박해도 중심지를 겨냥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절대 다수의 박해는 이집트와 소아시아, 그리스가 타겟이었다. 또한 성경에서도 초기 교회의 시작은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등 동방지역을 겨냥하고 있다. 물론 소아시아 교회들의 박해가 심했다고 해서, 로마 주교의 우위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의 진술이나 네로의 박해 등 로마 역시도 비교적 일찍 교회가 시작되었음은 종파를 막론하고 인정되며, 제국의 도성으로서 전체 교회의 특별한 관심을 로마 교회가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대체적으로 당시에도 로마 주교가 베드로의 후계자로 인정받았으며, 교회 규모와는 별개로 로마 주교가 주교들 중 우위성을 인정 받았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