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수위권 (문단 편집) ==== 바울로 서간 ==== 개신교에서는 바울로 서간에서 베드로의 지위를 다른 사도들과 병렬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이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갈라디아서 2:9절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순서 주의)을 '기둥과 같은 사도'로 묘사하여 이들을 새로운 성전의 기둥들로 이해하는 입장을 보인다.[* 크레이그 A. 에반스, 『예수와 교회』, CLC, 2016, 130p] 아울러 바울로가 베드로를 케파로 부르는 것은 오히려 베드로라는 이름의 그리스어 형태에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라는 의미를 환기시키기 때문에 이를 피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에티엔느 트로크메, 『초기 기독교의 형성』, 대한기독교서회, 2016. 118p, 이하『초기 기독교의 형성』] 아울러 바울로는 그가 개척한 교회에서는 최고 권위를 가진 수장으로 자리잡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교회들에서는 후대의 교회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제도화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교회들의 조직에 관해서는 어렴풋한 윤곽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바울은 명맥히[* 원문 오기] 그 수장(首長)이었으며, 그의 동역자들이 바울의 권위를 세우고 교리와 규율상의 단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들을 순회했다. 그러나 그 정확한 기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독들과 집사들이 세워져 있었던 빌립보 교회를 제외하면, 이들 교회에서 사역하던 목회자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고린도전서 12장-14장과 같은 텍스트에 의하면, 영적인 은사를 받은 적지 않은 수의 신도들이 다른 형제들에 대해 예배와 도덕과 관련, 그 기능은 명확치 않으나 권위 있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바울과 그의 주요 동역자들이 사라진 이후에야 고린도 같은 교회에 상존(常存)하는 목회자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 >-『초기 기독교의 형성』,125p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바울로와 베드로의 관계가 {{{-2 (그리고 후대의 교황권이)}}} 피라미드적 관료제라는 말을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바울로는 베드로에게 복종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을 헛되이 선포하지 않기 위해서는 베드로를 필요로 한다. 바울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 삼 년 만에야 베드로에게 오는 등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직무상 이름인 게파로 베드로를 부르는 등 베드로의 두드러진 지위를 전제한다. >56년경 로마서가 쓰이기 전에 바오로는 소아시아의 갈라디아 교회에 준엄한 편지 한 통을 썼다. "사람들이 시켜서도 아니요,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죽은 이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느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나 바오로…"(갈라 1,1). 무엇보다 그는 하느님과 부활하신 분이 보낸 사도(Apostolos)로서 자신의 근본적인 권위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는 어떤 다른 지도자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어떤 사도에게서 파견된 자도 아니고 어떤 교회로부터 파견된 사신도 아니다. 그는 그들의 권위하에 있는 아랫 사람이 아니다. 물론 베드로와의 관계는 필요하다. 그것은 복음을 헛되이 선포하지 않기 위해서(갈라 2,2)이다. 그렇다고 그는 베드로에게 복종하는 관계에 있지도 않다. >---- >-샤를르 페로, 《예수 이후-초대교회의 직무》, 가톨릭출판사, 2002, 84p >아무튼 바울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첫 번째 예루살렘 체류에 관해 매우 삼가면서 덤덤하게 언급한다(갈라 1,18-20). 거의 외적 정보들만 제공한다: 만난 사람들(자신의 논증에 중요한 인물들에 국한한다) 그리고 머문 기간. 필경 누이네 집에 묵었을 것이다. 바울로는 방문 목적을 단 한 가지만 밝혔으니, 게파를 만나서 알게 되는 것이었다.[* (책 속 주석) 신약성서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오는 동사 ιοτορῆσαι의 의미는 "만나서 알게 되다"에 국한되어야 한다. 특히 교부시대 해석에서의 지나친 의미 부여에 관해 Mußner, ''Gal'' 93-5 참조. 또한 G.D. Kilpatrick, Galatians 1, 18: ''NT Essays'' (Studies in Memory of T.W. Manson)(Manchester 1959) 144-9도 참조.] 이는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설적으로, 이 구절이 사도행전에 들어 있다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길 비판적 주석학자는 분명 아무도 없으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바울로는 그 고참 사도를 (언제나 그렇긴 하지만) 그냥 부르는 이름 시몬이 아니라 직무상 이름 게파로 칭하는데, 이 이름은 사도들 동아리에서 베드로의 두드러진 지위를 나타낸다.[* (책 속 주석) 게파라는 이름은 (요한 1,42를 제외하면) 오직 바울로 서간에만 나온다(8번). 갈라 2,7 이하에서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아무튼 바울로는 베드로를 방문하여 서로 알기 위해 왔는데, 한편 그로써 베드로에게 자신이 부름받은 사도로서 그와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표현에서 바울로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읽어 낼 수 있다. 바울로는 자신의 사도직을 게파에게 보증받고자 하지 않았고, 그에게서 복음에 관해 가르침을 받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런 까닭에 바울로는 다마스커스 사건 이후 삼 년 만에야 게파에게 왔던 것이니, 자신이 고양되신 주님께 직접 복음을 위임받았음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85p 아울러 바울로 계통 교회에서 '직무'와 '카리스마'는 상호배제하는 의미가 아니며, 가톨릭 교계제도나 사도계승에 대한 반대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러한 독해는 텍스트 자체의 의미를 넘어서는 독해이다. 무엇보다도, 바울로 자신이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고린토 교회의 혼란상을 조율하고 있으며, 그 어떤 주석학자들도 사도라는 '직무'가 초대 교회에서 가진 두드러진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코린토 교회에 대해 언급한 사실과 관련해서 보다 세부적인 사항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흔히 말하길, 이 교회는 공동체의 모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코린토 교회는 여러 어려움들을 갖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분열되어 있는 공동체였다{{{[}}}{{{-2 일부는 바오로파라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아폴로파, 또는 케파스파라고 불렸다(1코린 1,11-13)}}}{{{]}}}. 또한 여기에는 공동체가 묵묵히 견디고 있던 근친상간 사례도 있었다{{{-2 (5장)}}}. 그리고 시민 법정에서 해결해야 할 소송 사례도 있었고{{{-2 (6장)}}}, 자유가 너무 쉽게 잘못 이해되기도 했다{{{-2 (6장)}}}. 이것이 바로 코린토 공동체의 실상이었다. 그래서 코린토가 다른 공동체들을 위한 모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이 사례는 바오로가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던 경우인데, 이는 그가 신앙 안에서 이 공동체를 탄생시킨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__그는 여기서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권위를 십분 발휘했다. 그래서 이 문제들이 자유로운 카리스마적 방법으로 해결되도록 방치하지 않았다.__ 바오로는 공동체가 다양한 직무들이 성장하는 몸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에게 그러한 공동체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즉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또 어떤 이들은 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2 (1코린 12,28-30)}}}, 모든 카리스마가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지향해야 한다고 그는 가르쳤다{{{-2 (1코린 12,1)}}}. 바오로는 공동체 회중을 위해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무질서를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리스{{{-2 (Frieds)}}}[* (책 속 주석) [[https://de.wikipedia.org/wiki/Heinrich_Fries|H. Fries]], ''L{{{'}}}église, questions actuelles'', Paris 1966, p.540.]는 과연 코린토 교회가 카리스마적인 공동체였는가에 대해 질문하면서, 만일 카리스마를 특별한 선물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그 공동체는 카리스마적이 아니었다고 대답한다. __"카리스마적인 것이 어떤 구조나 명령, 규정, 권위 그리고 권리적 요소에 대한 배제로 이해되는 것이라면 코린토 교회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카리스마와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__ >......__마지막으로, 바오로는 티모테오와 티토{{{-2 (갈라 2,23; 2코린 2,13)}}} 그리고 에파프라스{{{-2 (콜로 4,12 이하)}}}와 에파프로디토{{{-2 (필리 2,25)}}} 그리고 오네시모{{{-2 콜로 4,9)}}}의 경우처럼 자신이 창립한 여러 공동체{{{-2 (1코린 16,10-11)}}}에 파견한 자신의 협력자들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__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1서 5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애쓰며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이끌고 타이르는 이들을 존중하십시오." >---- >호세 안토니오 사예스{{{-2 ''José Antonio Sayés''}}}, [[http://m.catholicbook.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12175|《교회론》]]{{{-2 ''La Iglesia de Cristo''}}}, 윤주현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8, pp,206-207 바울로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호소하고 있으며 "어떤 구조나 명령, 규정, 권위 그리고 권리적 요소에 대한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는 제도도 권위도 없는 카리스마적인 공동체였는데 후대에 제도와 권위가 들어왔다"는 개인주의적 교회론은 '직무'와 '카리스마'를 상호 배제하는 의미로 오독한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 이 둘은 상호 배제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바오로는 고린토 및 다른 곳에서 처음부터 그리스도인 직무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바오로 위서의 전통은 그의 목소리를 계속 담아내고 교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 >-샤를르 페로{{{-2 ''Charles Perrot''}}}, [[https://m.pauline.or.kr/?pId=FMGD0020&code=02&subcode=05&gcode=bo0015535&cname=book|《예수 이후 ―초대교회의 직무》]]{{{-2 ''Après Jésus: Le Ministère chez l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2, p.195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그리고 안티오키아에서 시작된 말씀은 외관상 무질서해 보이는 가운데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그 말씀은 전방 위로 뻗어나갔으며 여기서 파생된 일탈 현상이 효과적인 실행을, 곧 위협하게 되었다. 이미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에서와 같이 자신이 창설한 공동체 내부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직무의 무정부 상태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 >-샤를르 페로{{{-2 ''Charles Perrot''}}}, [[https://m.pauline.or.kr/?pId=FMGD0020&code=02&subcode=05&gcode=bo0015535&cname=book|《예수 이후 ―초대교회의 직무》]]{{{-2 ''Après Jésus: Le Ministère chez l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2, p.150 >사실 바오로 계통의 서간들은 앞선 세대와의 직무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생생한 관심을 각자의 방법과 나름의 언어로 증언하고 있다. 바오로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후발 주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기초하여 미래를 올바로 준비하고자 노력하였다. 직무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늘 새롭게 전개되는 중개(仲介)의 다양한 자리에서 순례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직무에 관한 사도 바오로의 건설적인 메시지는 망각되지 않고 각자의 상황에 적응되었다. >---- >-샤를르 페로{{{-2 ''Charles Perrot''}}}, [[https://m.pauline.or.kr/?pId=FMGD0020&code=02&subcode=05&gcode=bo0015535&cname=book|《예수 이후 ―초대교회의 직무》]]{{{-2 ''Après Jésus: Le Ministère chez l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2, p.100 또한 Franzen 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적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는 어떠한 교회상을 나타내고 있을까? 사도행전과 바오로의 서간들은, 원시교회에서 처음부터 영적 '직무'가 교회 질서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명백하게 알려준다. 직무도 없고 법규도 없고 확고한 신앙의 구성도 없이, 자유로운 영적 활동에 의거한 온전한 카리스마적 체제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오로의 교회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 직무는 특별한 봉사를 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되었던 카리스마와 대립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직무의 소유자가 동시에 카리스마적 소유자였던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2 (2고린 8,23; 디도: 필립 2,25; 갈라 1,19; 1고린 15,7)}}}. 반대로 카리스마의 소유자들이 교회의 지도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결국 바오로 자신도 성령의 소유자요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동시에 그는 직무의 소유자로서 새로 세운 그의 교회들이 세심하고 실제적이고 직무적이고 권위적인 엄격한 지도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냉정하고 객관적이었다. 카리스마들은 통상적인 교회 지도에 있어서 직무에 종속되어야만 하였다. >---- >--August Franzen · Remigius Bämer · Roland Fröhlich. 《세계 교회사》.[* 원제: 《Kleine Kirchengeschichte》(2000년판)] 최석우 옮김. 27-28쪽 >이 은사적 교회 모델을 어찌 평가해야 할까? 아니 도대체 하나의 모델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바오로는 상황ㅡ코린토 교회의 경우 상황이 빌미가 되었으나 또한 상황을 넘어선다ㅡ을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바라는 대로 교회를 구상한다고 말해야 옳다. 이 구상은 이상적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구상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단순한 훈계적 관심을 넘어서는 모델{{{-2 (본보기)}}}로서의 성격을 띤다.[* (책 속 주석)U.BROCKHAUS.'Charisma und Amt''(Wuppertal 1972).226-227에 따르면, 은사들에 관한 표상은 윤리 안으로도 교회 제도 안으로도 흡수되지 않고, 오히려 성령론 안에 정착한다. 사실 '제도'라는 말은 지나치다 하겠다.] 이 모델은 하나의 교회상을 얻도록 도와줄뿐더러, 신자 개개인이 전체 안에서 자기 위치를 보고 제 역할을 완수하도록 가르쳐 준다. '''실천에 관해 말한다면, 바오로가 교회 안에서의 '기능 수행'을 전적으로 상황 자체에 맡겼다고 짐작하면 안 된다. 신자 개개인이 성도들을 위한 봉사에 기꺼이 헌신한{{{-2 (1코린 16,15-16)}}} 것과 더불어, 바오로가 사도로서 편지와 대리인을 통해 직접 개입한{{{-2 (예컨대 14,26-33 참조)}}} 것도 유념해야 한다. 은사적 교회 모델에서도 봉사 직분의 수행에서 위아래가 드러난다. 이 직분 수행은 거부당해서는 안 되며, 존경과 순종도 요구한다.'''[* (책 속 주석)참조: E.SCHWEIZER, ''Gemeinde und Gemeindeordnung im NT''(AThANT 35)(Zürich 1959).90-91.] >---- >--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이종한 옮김. 154쪽 아울러 '초기 가톨리시즘'{{{-2 (Frühkatholizismus, "초대교회의 특유한 가톨릭적인 형태")}}}[* 『백과사전이나 신학전문서적을 펼쳐봐도 '초기 가톨리시즘'이란 하나의 독립된 어휘로서의 표제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초기 가톨리시즘'이란 낱말이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금세기 불후의 명작인 개신교계통의 신학대사전 ''Die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와 가톨릭계통의 신학대사전 ''Lexikon für Theologie und Kirche''에서도 다른 주제나 표제어를 설명하는 가운데 다만 부분적으로 언급하거나 암시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초기 가톨리시즘'에 대한 개념이나 의미설명도 약간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F. Mussner의 설명이 가장 포괄적이고 무리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는 '가톨리시즘'을 설명하면서 '초기 가톨리시즘'을 곁들여 해설하는데, '초기 가톨리시즘'을 한마디로 "초대교회의 특유한 '가톨릭적인' 형태"라고 요약한다.』, 이영헌, "新約聖書와 初基 가톨리시즘", 〈신학전망〉 90(1990)]과 관련하여, 개신교 신학자인 [[https://de.wikipedia.org/wiki/Ernst_K%C3%A4semann|Ernst Käsemann]]은 "바울로사도를 '초기 가톨리시즘'의 창시자로 여기고자 한다. 왜냐하면 바울로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세계적인 선교를 할 수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논문 내 주석) E. Käsemann, ''Paulus und Frühkatholizismus'', in : ''ebd''. S. 240-245]"[* 이영헌, "新約聖書와 初基 가톨리시즘", 〈신학전망〉 90(1990)] 요약하자면, 바울로 서간은 바울로의 독립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지만 베드로의 두드러진 지위를 전제하고 있으며, 개인의 카리스마가 강조되고 있지만 이 카리스마는 '직무'와 '제도'를 배제하는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