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수위권 (문단 편집) === 마르코 복음서 === 개신교 성서학자들은 4복음서 중 최초로 쓰여진 마르코 복음서가 베드로의 무지함을 강조하는 걸 지적한다. 우선 베드로 수위권의 주된 근거가 되는 마태오 복음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평행을 이루는 마르코 복음 8장에서는, 베드로의 고백 바로 다음 구절에서 베드로의 무지함을 강조하고 '사탄'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이 부분은 마태오 16,21-23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병행구절로 있으며, 마태오 복음서에서도 베드로의 고백 바로 다음에 위치한다.] ||<-2> [[https://www.academic-bible.com/en/bible/NA28/MRK.8|마르코 복음서 8장 27-33절]] || ||<-2> '''^^27^^ Καὶ ἐξῆλθεν ὁ Ἰησοῦς καὶ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εἰς τὰς κώμας Καισαρείας τῆς Φιλίππου· καὶ ἐν τῇ ὁδῷ ἐπηρώτα τοὺς μαθητὰς αὐτοῦ λέγων αὐτοῖς· τίνα με λέγουσιν οἱ ἄνθρωποι εἶναι; ^^28^^οἱ δὲ εἶπαν αὐτῷ λέγοντες [ὅτι] Ἰωάννην τὸν βαπτιστήν, καὶ ἄλλοι Ἠλίαν, ἄλλοι δὲ ὅτι εἷς τῶν προφητῶν. ^^29^^ καὶ αὐτὸς ἐπηρώτα αὐτούς· ὑμεῖς δὲ τίνα με λέγετε εἶναι; ἀποκριθεὶς ὁ Πέτρος λέγει αὐτῷ· σὺ εἶ ὁ χριστός. ^^30^^καὶ ἐπετίμησεν αὐτοῖς ἵνα μηδενὶ λέγωσιν περὶ αὐτοῦ.''' '''^^31^^Καὶ ἤρξατο διδάσκειν αὐτοὺς ὅτι δεῖ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πολλὰ παθεῖν καὶ ἀποδοκιμασθῆναι ὑπὸ τῶν πρεσβυτέρων καὶ τῶν ἀρχιερέων καὶ τῶν γραμματέων καὶ ἀποκτανθῆναι καὶ μετὰ τρεῖς ἡμέρας ἀναστῆναι· ^^32^^καὶ παρρησίᾳ τὸν λόγον ἐλάλει. καὶ προσλαβόμενος ὁ Πέτρος αὐτὸν ἤρξατο ἐπιτιμᾶν αὐτῷ. ^^33^^ὁ δὲ ἐπιστραφεὶς καὶ ἰδὼν τοὺς μαθητὰς αὐτοῦ ἐπετίμησεν Πέτρῳ καὶ λέγει· 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σατανᾶ, ὅτι οὐ φρονεῖς τὰ τοῦ θεοῦ ἀλλὰ τὰ τῶν ἀνθρώπων.'''[* ^^27^^Kai exēlthen ho Iēsous kai hoi mathētai autou eis tas kōmas Kaisareias tēs Philippou· kai en tēi hodōi epērōta tous mathētas autou legōn autois· tina me legousin hoi anthrōpoi einai; ^^28^^hoi de eipan autōi legontes {{{[}}}hoti{{{]}}} Iōannēn ton baptistēn, kai alloi Ēlian, alloi de hoti heis tōn prophētōn. ^^29^^kai autos epērōta autous· hymeis de tina me legete einai; apokritheis ho Petros legei autōi· sy ei ho christos. ^^30^^kai epetimēsen autois hina mēdeni legōsin peri autou.[br][br]^^31^^Kai ērxato didaskein autous hoti dei ton huion tou anthrōpou polla pathein kai apodokimasthēnai hypo tōn presbyterōn kai tōn archiereōn kai tōn grammateōn kai apoktanthēnai kai meta treis hēmeras anastēnai· ^^32^^kai parrēsiāi ton logon elalei. kai proslabomenos ho Petros auton ērxato epitimān autōi. ^^33^^ho de epistrapheis kai idōn tous mathētas autou epetimēsen Petrōi kai legei· hypage opisō mou, satanā, hoti ou phroneis ta tou theou alla ta tōn anthrōpōn.] || ||^^27^^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18^^^^27^^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9^^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0^^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 ^^31^^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 [[https://bible.cbck.or.kr/Knbnotes/Bible/Mk/8|가톨릭 새번역]] || [[http://www.holybible.or.kr/B_SAENEW/cgi/bibleftxt.php?VR=SAENEW&VL=41&CN=8&CV=99|개신교 새번역]] || >8:31에서 마가는 예수의 첫 번째 수난-부활 예고를 언급한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한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침묵을 요구하지 않고 "드러내어 놓고"[plainly](8:32) 이 말씀을 하신다. 문맥에 따르면, 이것은 현재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예수의 고백이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여전히 예수의 고백과 베드로의 고백이 일치하며,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의 고백과 조화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중략) 8:32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고백에 뒤이어 그분을 꾸짖는다. 이제 이것은 오해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베드로가 예수의 고백에 뒤이어 그분을 꾸짖었다면, 베드로는 예수의 고백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며, 베드로의 그리스도 신앙고백은 고난 받는 인자로서의 예수의 고백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의 그리스도 개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예수의 그리스도 개념과는 모순된다. > >예수와 베드로의 대결은, 우리가 마가복음에서 '꾸짖다'라는 단어가 귀신 축출을 뜻하는 전문 용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훨씬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예수께서는 일전에 더러운 영을 꾸짖으실 때에(1:25), 그를 귀신의 세력으로 취급하셨다. 마가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 번의 꾸짖음(8:22-10:52를 제외하고 3번으로 1:25; 3:12; 4:39을 말한다-역주[* 역서 내 역주])은 귀신과 관련된 배경을 떠오르게 하고, 두 등장인물이 서로를 사탄적인 인물로 대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중략) 마가복음에서 베드로는 사탄적인 인물로 밝혀지는, 그것도 예수에 의해서 그 정체가 탄로 나는 유일한 사람이다. >---- >베르너 H. 켈버, 『마가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 감은사, 2019, 75-79p; 이하 베르너 H. 켈버 심지어 예수님과 베드로(및 베드로가 대표하는 제자 집단) 사이의 이런 불일치는 마르코 복음의 결말 부분에서도 해소되지 않고 있으며, 마르코 복음의 원래 결말부분이었던 16장 8절[* 현재의 마르코 복음은 16장 20절에서 끝나나 다수의 사본 증거를 고려할때 원래의 결말이 8절에서 끝났다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은 마르코가 제자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는 점을 입증한다고 보고 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16:7). 마지막 어구는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한다(14:28). 예언된 대로, 예수께서는 부활하셨고, 이제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호소하고 있으시다. (중략) 하지만 그 여성들은 이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지가 이 여성들의 실패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고] 좌초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은 갈릴리로 되돌아가라는 신호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결고 알지 못했다. (중략)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들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 > 베르너 H. 켈버, 142-148p 해당 관점에서 볼때 마르코 복음의 이러한 서술은 베드로를 넘어서 예루살렘 교회 자체에 대한 마르코의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아울러 이러한 반대는 예루살렘 함락으로 인한 예루살렘 교회의 몰락으로 인해 예수의 예언이 실현되었다는 인식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종합하면, 열둘, 세 제자, 베드로, 예수의 가족, 갈릴리 여인들에 대한 마가의 전체적인 비판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확인되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비판 논리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겨냥하기도 한다. 예수를 가장 가깝게 따르던 자들이 갈릴리 공동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를 버렸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대관식을 놓쳐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예루살렘에 멈춰선 채 목적지인 갈릴리로 결코 돌아가지 못했다.(중략) 마가의 이야기가 예루살렘 교회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 인정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가 감히 그럴 수 있었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중략) 마가복음 독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은 예수 자신의 죽음에 관한 예언처럼 실현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마가복음이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파괴에 뒤이어, 예루살렘 교회의 몰락을 완전히 알게 된 다음인, 주후 7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가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예루살렘과 성전과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반대할 수 있는 이유이다. >---- > 베르너 H. 켈버, 152-156p 그러나 마르코가 베드로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은,그것은 베드로 개인의 인품에 대한 대한 복음사가의 단죄가 아니다. 이미 켈버의 해석에서도 전제하고 있듯이,''' '베드로가 대표하는' 제자단의 인간적 약점을, '대표로 베드로를 지목해서' 부각하는 것이다.''' 공관 복음서, 특히 마르코 복음서의 이해에 의하면, 파스카 이전엔 예수 주변의 그 어떤 인간도 메시아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선 마리아도 베드로{{{-2 (마르 8,31-33)}}}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해당 인물들을 나쁘게 말하기 위해 복음사가가 넣은 게 아니라, {{{-2 (예수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바로 그렇기에, 마르 3,31-35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다소 가혹하게 말하는 것 역시도 마리아 개인의 인품에 대한 교회의 단죄가 아니다. 가톨릭과 성공회의 일치 선언문에서는, 마르 3,31-35를 다음과 같이 공동으로 해석한다:[br][br]「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뒤에 세 공관 복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참가족은 누구인지를 언급하믄, 어떤 면에서는 다소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2 (마르 3,31)}}} 밖에 서서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였다고 말합니다.^^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가족과 거리를 두시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종말론적 의미에서 당신의 가족'이라는,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2 (마르 3,35)}}} 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__'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도 포함하여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은 예수님 사명의 참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은 주님의 제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났습니다{{{-2 (예: 마르 8.33-35; 9,30-33; 10,35-40)}}}.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이해하는 과정은 길고도 험난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십자가와 빈 무덤을 보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신앙에 이를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__」{{{[}}}After these birth stories, it comes as something of a surprise to read the episode, narrated in all three Synoptic Gospels, which addresses the question of Jesus’ true family. Mark tells us that Jesus’ “mother and his brothers” (Mark 3:31) come and stand outside, wanting to speak to him.^^3^^ Jesus in response distances himself from his natural family: he speaks instead of those gathered around him, his ‘eschatological family’, that is to say, “whoever does the will of God” (3:35). __For Mark, Jesus’ natural family, including his own mother, seems at this stage to lack understanding of the true nature of his mission. But that will be the case also with his disciples (e.g. 8:33-35, 9:30-33, 10:35-40). Mark indicates that growth in understanding is inevitably slow and painful, and that genuine faith in Christ is not reached until the encounter with the cross and the empty tomb.__{{{]}}}[br]성공회-로마 가톨릭 국제 위원회{{{-2 (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과 희망이신 마리아〉{{{-2 ([[https://www.anglicancommunion.org/media/105263/mary-grace-and-hope-in-christ_english.pdf|''Mary: Grace and Hope in Christ'']])}}}, 2005[* 번역 출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교회일치문헌》 제2권, 2009, pp.253-254.], 제19항] 베드로도, 예루살렘의 야고보도, 마리아도, 초대 교회에서 존경 받는 유명인사였고, 이러한 유명인사들이 인류의 무지를 대변하는 건 매우 효과적인 이야기 장치였다. 마르코가 특히 이런 관점을 강조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는 성경 전체가 공유하는 관점이다. 가령 루가 복음서는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2 (루가 2,48)}}}고 무지하게 예수를 질책하는 마리아를 소개하고,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2 (루가 2,49)}}}라는 예수의 질책을 소개한다. 그렇기에, 앵커바이블 주석에선, 마르 8,27-30과 똑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병행구절을 해설하며 베드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The interest in Peter's failures and vacillation does not detract from this pre-eminence; rather, it emphasizes it. Had peter been a lesser figure his behavior would been of less consequence {{{-2 cf. Gal ii 11 ff.)}}}. >[베드로의 실패와 흔들림에 대한 관심은 이 탁월함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한다. 베드로가 덜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그의 행위는 훨씬 덜 중요했을 것이다 {{{-2 (cf. 갈라 2,11 ff.)}}}.{{{]}}} >----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https://www.amazon.com/Matthew-Translation-Introduction-Commentary-Anchor/dp/038508658X|《The Anchor Bible Matthew: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Doubleday & Company, Inc., 1971, p.195 그리고 마르 8,31-33과 똑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병행구절{{{-2 (마태 16,21-23)}}}을 해설하면서는 이렇게 말한다. >Peter spoke for the rest in confessing Jesus as Messiah, and here he is their spokesman in protecting the need for the Messiah to suffer and to die. >----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같은 책, p.200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베드로의 인간적 약점과 무지함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베드로가 1세대 교회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비판 받으니 그는 교회를 대표할 수 없다"라는 관점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한 현대 성서주석학의 연구 성과를 반대로 오독한 것이며, 오히려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신약 저자들에게 당연했기에, 베드로의 인간적 약점이 부각된 것이다"라고 읽는 것이야말로 현대 주석학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서, 더 나아가서 신약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베드로의 약점들은 그가 대표하는 '교회'의 약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