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향곡 (문단 편집) ===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 베토벤 이후의 낭만주의 시대에 교향곡은 음악가의 음악적 성취의 가장 최고봉을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고, 음악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베토벤이 시도한것 같은 실험적 시도는 크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슈베르트]], [[로베르트 슈만|슈만]], [[펠릭스 멘델스존|멘델스존]]은 베토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는데, 베토벤과 동시대를 살았던 슈베르트의 경우 형식적으로 베토벤의 영향하에 놓였지만, 이후 등장한 슈만과 멘델스존은 전기 낭만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소나타 형식 등 교향곡의 기본적인 틀을 존중하면서도 조금 더 자유로운 형식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후배인 [[요하네스 브람스|브람스]]는 4악장 형식, 소나타 형식, 2관 편성을 준수하는 보다 보수적인 성향으로 돌아갔으나 형식과 내용, 전개의 완벽에 가까운 조화로 베토벤 이후 다시 한번 교향곡 역사에 이정표를 남겼다. 다른 한편으로 [[엑토르 베를리오즈|베를리오즈]]는 환상교향곡에서 베토벤 이후로 편성규모의 확대를 시작한 이래로 대규모 오케스트라에 의한 교향곡의 길을 열었다. 베를리오즈는 12대의 하프와 오르간에 400여명의 합창단, 전대미문의 초대형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연주되는 작품[* Te Deum. 교향곡은 아니고 일종의 종교음악이다. 편성이 너무 커서 일반적으로는 줄여서 연주한다. 지못미] 을 구상했을 정도로 교향곡에서 대형 편성을 추구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베를리오즈는 협주곡 같은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다([[비올라]]가 독주 악기로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해롤드). 후기 낭만파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시도들이 집약되어 나타났다. [[안톤 브루크너|브루크너]]는 소나타 형식을 확대하였는데, 세 개의 주제를 다루면서도 전개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능숙한 작곡 기법을 보여 교향곡을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이끌었다.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금관악기의 주법을 구사했으며, 오르간의 연주법에서 응용한 화성의 전개등을 선보였다. 브루크너와 바그너의 영향을 나름대로 소화한 [[구스타프 말러|말러]]는 베를리오즈가 추구한 초대형 편성의 교향곡 노선을 계승했는데, 교향곡 2번 "부활"에서 베토벤과 비슷하게 곡의 말미에 합창이 등장하는 교향곡을 썼다.[* 다만, 베토벤과 다른점은 우선 4악장이 아니라 5악장이라는 점과 4악장에서 독창이 나온다는 점 등이 있다. 실제로 말러 역시 이 곡을 작곡하면서 베토벤을 따라했다고 비판받지는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중기 이후에는 조성의 체계가 점점 무너지고 점점 편성이 커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 정점을 찍은 게 천인교향곡으로 불리는 [[교향곡 제8번(말러)|교향곡 8번]]. 후기에 가서는 소나타 형식과 중심조성마저 포기할 정도로 점점 현대음악에 접근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교향곡 제10번(말러)|교향곡 10번]] 1악장 서두에 비올라만으로 연주되는 쓸쓸한 주제는 조성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거기에 1악장과 5악장에서는 무려 9개의 반음이 한꺼번에 울려퍼지는 충격적인 불협화음이 등장한다.[* 옥타브를 제외한 모든 반음 12개중 3개만을 제외한 것이다.] 그리고 말러에게 다대한 영향을 받은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안톤 베베른]]은 현대음악의 포문을 열게 된다. 한편 후기 낭만주의 시대에 동유럽에서는 국민악파가 형성되었다. 동유럽의 작곡가들도 나름대로의 교향곡들을 작곡했고 주류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기 나라의 독특한 음악적 소재들을 활용한 교향곡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동유럽의 교향곡 작곡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는데, 독일 고전낭만주의 교향곡 형식을 존중하는 작곡가와, 이를 무시하고 민족적 선율의 반복을 강조한 국민악파 작곡가다. [[안토닌 드보르자크|드보르자크]], [[표트르 차이콥스키|차이콥스키]]는 독일 고전낭만주의 형식을 존중하면서도 민족적 특색을 반영하여 성공적인 작품을 작곡했다. 반면 [[알렉산드르 보로딘|보로딘]],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림스키-코르사코프]], [[장 시벨리우스|시벨리우스]],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글라주노프]] 등 국민악파는 고전 형식미에 집착하지 않은 채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런 관점의 차이로 러시아의 경우 국민악파 작곡가들과 차이콥스키 사이에 골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차이콥스키는 독일 음악을 추종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차이콥스키는 지금도 --압도적인 대중적 인기와 달리-- 러시아 내에서의 음악적 평가에 있어 [[러시아 5인조]]에 비해 미묘하게 박한 대접을 받고 있다.] 20세기에 접어들고 현대음악이 등장하면서 교향곡의 위상은 낭만주의 시대와는 달리 약화되었다.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제국주의 시기 발달한 유럽의 대형 오케스트라들이 몰락함으로써 작곡가들은 거대한 규모의 교향곡을 작곡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교향곡에 과연 미래가 존재하는가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나타나게 되었다.[* 다만 제2빈악파 작곡가 모두 대형 오케스트라를 위한 무조 작품을 쓴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쇤베르크]]나 [[안톤 베베른|베베른]]은 12음 기법을 도입한 소규모의 교향곡을 내놓았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스트라빈스키]]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프로코피예프]]는 신고전주의에 입각한 교향곡[* 스트라빈스키의 시편교향곡, 프로코피예프의 고전교향곡이 그 예]을 내놓기도 했다. 20세기 교향곡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소련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쇼스타코비치]]였는데, 고전적인 소나타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근현대 음악의 어법을 최대한 활용한 절충적인 교향곡들을 내놓았다. 크게 조성을 벗어나지 않는 선율미를 보이면서도 날카로운 풍자의 멋을 갖춘 그의 교향곡들은 소련과 서방을 막론하며 대중들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으며, 지금까지도 그를 독특한 위치의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편으로, 20세기 후반에는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나 [[알프레드 슈니트케]]가 교향곡의 한계를 돌파할 방법을 나름대로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각기 불확정성 기법과 폴리스타일리즘이라는 개성적인 어법으로 침잠해가는 교향곡의 역사에 의미있는 돌파구를 제시했다고 여겨진다. 한국 출신의 작곡가로는 [[윤이상]]이 1980년대에 교향곡 작곡을 시작하여 다섯 편의 작품을 남겼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교향곡은 나오고 있다. [[핀란드]]의 지휘자인 레이프 세게르스탐은 무려 200여곡이 넘는 미니 교향곡들을 내놓았고,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는 2005년에 8번 교향곡을, [[필립 글래스]]는 2005년에 7번과 8번 교향곡을, [[존 쿨리지 애덤스]]는 2007년에 교향곡 "원자폭탄 박사"를 내놓았다. 그러나 클래식 작곡이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고 침체의 길을 가고 있는 만큼 [[쇼스타코비치]]의 반열을 잇는 심포니스트가 나오기에는 요원해 보이며, 무엇보다도 현대 작곡가들이 교향곡이라는 전통적 장르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 나오더라도 전통적인 형식미를 준수하는 교향곡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니, 사실상 교향곡의 명맥은 끊겼다고 보는 시선도 많다. [[대한민국|한국]]에서는 나운영[* 군가 '전우'를 작곡한 사람이다.]이 13개의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3번 완성 뒤 14번을 구상했지만 건강 악화로 타계하면서 완성되지 못했다고 하며, 무엇보다 사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다. 나운영 외에도 정윤주가 다섯 곡을, 조념이 파기 혹은 분실된 작품을 제외하고 제3번 '통일'과 제4번 '산하' 두 곡을 남기는 등 나름대로 교향곡들이 계속 작곡되고 있다. [[김순남]]도 남북 통틀어 [[한반도]] 최초의 교향곡들인 교향곡 제1번과 합창 교향곡 '태양없는 땅'을 작곡했다고 하지만, [[월북]]으로 인해 두 작품의 악보가 모두 행방불명인 상태다. [[북한]]에서도 교향곡이 작곡되고 있는데, 1960년대 후반까지는 신도선의 교향곡 제1번이나 문경옥의 교향곡 제1~6번같이 전통적인 양식에 따른 교향곡들이 나왔다. 하지만 그 후 문화예술계에서 실권을 쥐락펴락하기 시작한 [[김정일]]이 쓸데없이 얕은 지식으로 감 놔라 대추 놔라를 시전했기 때문에 '모든 기악 작품은 기존의 노래를 주제로 창작되어야 한다'는 괴이한 논리가 적용되었고, 그 때문에 '[[교향곡 피바다|피바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에 저항,항거하는 내용으로, 지휘자 김홍재에 의해 일본 초연, 한국 전주시립교향악단에 의해 한국에서 공연된 기록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교향곡 피바다]] 참조.]나 '꽃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같은 혁명가극 노래들을 주제로 한 교향곡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성악 종속 현상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1990년대에는 각각 김일성, 김정일 찬양 가요들을 주제로 한 '경례를 받으시라'와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같이 제목부터 [[손발퇴갤]]하게 만드는 곡들이나 영화 주제가들을 주제로 한 '내 나라 제일로 좋아', 오래된 혁명가요들을 주제로 한 '지원'과 '항일대전의 승리'등이 작곡되었다. 이렇게 기악 작품 전반이 최고 권력자의 논리에 잠식된 덕에, 1960년대 이후에는 교향곡에서든 다른 관현악 작품에서든 공통적으로 창작력의 빈곤과 강한 정치색에 따른 편곡식 작품들만이 양산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