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토시/역사 (문단 편집) == 도시 변천사 == || [[파일:Heiankyo_landsat.jpg|width=100%]] || ||헤이안쿄와 현대 교토의 비교. 붉은 선 안쪽이 옛 헤이안쿄 자리이다. || || [[파일:external/www.city.kyoto.lg.jp/heian.gif|width=100%]] || [[파일:HeiankyouMapJapanese.svg|width=100%]] || ||<-2> 조성 당시의 헤이안쿄 || 당시 지명 [[나생문|나성문羅城門]] 내리內裏 안가문安嘉門 위감문偉鍳門 달지문達智門 상서문上西門 상동문上東門 은부문殷富門 양명문陽明門 조벽문藻壁門 대현문待賢門 담천문談天門 욱방문郁芳門 황가문皇嘉門 주작문朱雀門 미복문美福門 신천원神泉苑 동시東市 서시西市 동사東寺 서사西寺 일조대로一條大路 정친정소로正親町小路 토어문대로土御門大路 〇〇대로大路 근위대로近衛大路 감해유소로勘解由小路 중어문대로中御門大路 춘일소로春日小路 대차어문대로大次御門大路 냉천대로冷泉大路 이조대로二條大路 압소로押小路 이조방문소로二條坊門小路 육각소로六角小路 사조방문소로四條坊門小路 금소로錦小路 사조대로四條大路 능소로綾小路 오조방문소로五條坊門小路 고십소로高辻小路 오조대로五條大路 통구소로樋口小路 육조방문소로六條坊門小路 양해소로楊海小路 육조대로六條大路 좌녀우소로左女牛小路 칠조방문소로七條坊門小路 북소로北小路 칠조대로七條大路 염소로塩小路 팔조방문소로八條坊門小路 매소로梅小路 팔조대로八條大路 침소로針小路 구조방문소로九條坊門小路 신농소로信濃小路 구조대로九條大路 서경극대로西京極大路 무차소로無差小路 산소로山小路 창포소로菖蒲小路 목십대로木辻大路 혜지리소로惠止利小路 마대소로馬代小路 우다소로宇多小路 도조대로道祖大路 야사소로野寺小路 서굴천소로西堀川小路 서인부소로西靱負小路 서대궁대로西大宮大路 서즐사소로西擳笥小路 황가문대로皇嘉門大路 서방성소로西坊城小路 주작대로朱雀大路 방성소로坊城小路 임생대로壬生大路 즐사소로擳笥小路 대궁대로大宮大路 저웅소로猪熊小路 굴천소로堀川小路 유소로油小路 서동원대로西洞院大路 정고소로町尻小路 실정소로室町小路 오환소로烏丸小路 동동원대로東洞院大路 고창소로高倉小路 방리소로方里小路 부소로富小路 동경극대로東京極大路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천황의 명칭은 교토의 지명+원院을 사용했는데, 실제로 장지명 또는 주요 거처를 시호로 정하는 사례는 제법 흔하다. 또 섭관시대와 [[인세이]] 시대의 특성상 [[존호]]=[[시호]]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가|구쿄]]의 가문 명칭은 이곳 지명에서 따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헤이안쿄는 [[당나라]]의 [[시안시|장안]]을 본따 --동서 4.5km, 남북 5.2km의 [[나성#s-2|외성]]을 건축한 후--[* 본래 [[당나라]]의 도성제(都城制)를 수용하여 [[나성#s-2|외성]]의 건축을 계획했으나, 막대한 비용 문제와 외침이 거의 없는 [[일본]]의 [[섬나라|환경적 특수성]]으로 인해 필요성이 의문시되어 건축되지 않고 외국 [[사신(외교)|사신]]이 들어오는 주작대로 남단의 나성문(羅城門, 후에 [[나생문]](羅生門)으로 변천) 좌우에만 이중의 성벽을 쌓는데 그쳤다.] 북쪽에 궁성을 만드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대단한 도성을 만든 업적이 자랑스러웠는지 남북으로 뻗은 주작대로[* 현대에는 아래에 서술되는 도시 변천으로 인해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센본도리로 남아있다.]를 기준으로 도성 서쪽은 우경(右京 우쿄), 동쪽은 좌경(左京 사쿄)로 나누었는데[* 천자남면사상(天子南面思想-[[천자]]는 남쪽을 바라보고 [[정사]]를 행함)을 근거로 헤이안쿄 북쪽에 위치한 궁성에 거하던 [[천황]]이 주작대로를 바라봤을 때를 기준으로 좌·우를 나누었다.][* 오늘날 [[교토시]] [[가미교구]](上京区), [[나카교구]](中京区), [[시모교구]](下京区) 일대로 현재의 [[우쿄구]], [[사쿄구]]와는 전혀 다른 지역이다. 현행 [[우쿄구]], [[사쿄구]]는 전근대엔 [[교토시|교토]] [[교외|시가지 밖의 지역]](洛外)으로 각각 교호쿠(京北), 라쿠토(洛東)라 불리었다.] 별칭을 각각 [[장안]](長安 조안), [[뤄양|낙양]](洛陽 라쿠요)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쪽의 장안은 가쓰라가와의 습기와 잦은 범람 때문에 주거에 적절하지 않아 일찍이 풀이 무성한 습지대가 되어 버렸다. 교토의 주요 사찰들이 도성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 자리잡은 것도 이런 이유였다. 도성 서쪽이 쇠락하면서 장안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레 쓰이지 않게 된 반면 수도 동쪽을 일컫는 낙양이라는 말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된다. 교토에 들어가는 것을 상락(上洛) 또는 입락(入洛)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름의 흔적이다. 헤이안쿄 조성 이후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교토는 여러 차례 모습이 바뀌었다. 중대한 계기는 [[오닌의 난]]으로 이 난리통에 교토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교토의 고찰들도 이때 화를 면치 못했고 현재 교토에 남은 전각들은 절대다수가 15세기 이후의 건축물이다.[* 오히려 나라의 경우 전란을 비껴갔기 때문에 [[도다이지]], [[야쿠시지]] 등 천 년이 넘은 고건축이 많아 남아있다.] 서서히 도시가 재건되긴 했지만 예전같이 복구할 만한 역량은 모이지 않아[* 교토는 [[무로마치 막부]]의 수도 격이고 천황이 있는 만큼 무로마치 막부나 천황가가 나서야 했지만, 문제는 둘 다 처참하게 몰락했다는 것이다. 특히 천황가는 사정이 심각했는데 [[고나라 덴노]]의 경우는 돈이 없어서 즉위식도 바로 치르지 못했고 즉위 10년이 지난 후에야 유력 다이묘들이 모은 성금으로 간신히 치를 수 있었다. 막부 역시 오닌의 난 이후로는 쇼군이 천황과 같은 명목상의 지도자로 추락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대형 공사를 감당할 형편이 아니었다.] 도시가 남북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오늘날 카미교와 시모교 구 일대에만 사람이 거주하고 중간의 나카교 구는 논밭으로 전락했다. || [[파일:Odoi_landsat.jpg|width=100%]] || || [[오도이]]의 위치. 붉은 선이 오도이이다. || 이렇게 몰락한 교토를 부흥시킨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어느정도 평화를 되찾은 후 히데요시는 도시를 정비하는 한편 경계에 [[오도이]](御土居)라는 토성을 쌓았다. 이때의 성곽은 정방형의 헤이안쿄와는 달리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이다. 수도를 낙양이라고 부르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이 성곽 안쪽을 낙중(洛中), 바깥을 낙외(洛外)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삼은 뒤에 한양 도성과 사대문을 만든 후 그 안을 사대문안, 그 밖에 한성부의 범위가 미치는 곳을 [[성저십리]]라 부른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여기저기 흩어진 절들을 모아 사찰 거리인 데라마치(寺町)를 형성한 것도 그의 지시에 따른 것. 히데요시는 [[오사카시|오사카]]에 거대한 [[오사카 성]]을 짓기는 했지만 교토에 저택과 성을 짓는 등 이곳에서 주로 활동했다. 또한 히데요시에 뒤이어 들어선 [[에도 막부]]는 전란으로 무너진 고찰들을 복구하였는데 많은 전각들이 [[에도 시대]] 초인 17세기의 작품들이다. 에도 시대의 교토는 문화 중심으로서 정치 중심지인 [[에도]], 상업 중심지인 [[오사카시|오사카]]와 함께 [[일본]] 3대 도시의 위상을 유지했다.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는 [[오사카시|오사카]]보다도 번화했다는 내용이 있다. >[[도지|동사]](東寺)에서 [[다이토쿠지|대덕사]](大德寺)까지 20리는 모두 상가 가운데로 지나왔는데, 인가의 조밀함이나 화물의 산적함이나 남녀가 북적이는 것이 [[오사카시|대판]]보다 10배가 되었다. - 강홍중, 『동사록』 >경도(京都)로 들어가는 도중에... (중략) 여기서부터는 민가가 즐비하여 꾸불꾸불 돌아서 갔다. 인구가 빽빽한 것과 의복의 찬란함은 [[오사카시|대판]]에 비하여 오히려 나은 듯하였으나, 시가와 전포는 생활이 조금 못한 듯하였다. - [[조엄(조선)|조엄]], 『해사일기』 교토가 다시 일본 정치의 무대가 된 것은 막부 말기의 일이다. [[미국]]의 개국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막부의 무능한 행태에 분노한 토막파가, [[천황]]에게 실권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천황]]이 머무르는 교토에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토막파와 막부파의 갈등은 유혈 사태와 전쟁으로 번졌다. 무려 [[천황]]의 거주지 바로 바깥에서 금문의 변이 발발. [[오미야 사건]], [[무진전쟁#s-2.1|토바 후시미 전투]] 등이 잇따랐다. 하지만 1869년 [[천황]]과 정부가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새 수도로 채택하면서 정치 중심으로서 교토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오늘날 교토는 150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이다. 곳곳에 오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대적 모습이 주를 이룬다. 천년고도에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시대]] 신불분리령으로 촉발된 폐불훼석 덕분이다. 이때 [[신토]] 이외의 외래 종교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던 교토의 오래된 [[절(불교)|사찰]]들은 대부분의 토지를 내주었다. 강제로 폐사되거나 다른 사찰과 합쳐진 사례도 많이 발견된다. 일례로 [[도시샤대학]]은 쇼코쿠지와 합사되어 사라진 절터에 건설되었으며, 덴류지는 보유한 산림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기요미즈데라]]는 심지어 광대한 토지 중 9할을 잃어버리고 현재 남은 게 1할 정도이다. 헤이안쿄 시절부터 거리 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아 시내는 바둑판같이 길이 나 있다. 동서 대로는 이치조, 니조, 산조.. 식으로 숫자 뒤에 조(条)가 붙는다. 헤이안쿄 시절에는 쿠조(九条)까지 있었지만 후대에 10번째 대로인 주조(十条)가 추가되었다. 장소도 주소보다는 교차로 이름으로 찾는다. 길이 대부분 남북/동서로 나 있기 때문. 예를 들면 이마데가와도리(今出川通)와 가라스마도리(烏丸通)의 교차점은 가라스마이마데가와[* [[도시샤대학]]과 [[교토고쇼]]가 있는 지역] 라고 부르고, 시조도리(四条通)와 가와라마치도리(川原町通)의 교차점은 시조가와라마치(四条河原町)[* 교토의 최대 번화가.] 라고 부른다. 택시를 타도 교차점 이름만 부르면 알아서 간다. 단, 몇몇 특이한 경우가 있는데, 가령 [[교토대학]] 근처에 있는 히가시오지(東大路) 도로와 이마데가와 도리(今出川通) 도로의 교차점을 '히가시오지이마데가와'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햐쿠만벤(百万遍)[* 근처의 사찰 지온지(知恩寺)의 승려가 염불을 백만 번 외워 전염병을 퇴치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이라고 한다. 이렇게 들쑥날쑥한 이름은 히가시오지 도리[* 도로 이름도 히가시야마 도리라고 읽기도 한다. 특히 버스는 히가시야마 도리로 통일.]에 특히 많은 편이다. 그래도 택시 아저씨들은 저렇게 이야기해도 잘만 데려다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거리 이름을 노래로 부르면서 외우기도 한다. 동서로 이어지는 길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외우는 노래[* 노래에서 고조도리(五条通) 이후에는 몇 가지 바리에이션이 있는데 나중에 이 노래를 완성시키면서 멋대로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와 남북으로 이어진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외우는 노래 각각 하나씩 총 2개가 있다. 이 중 동서로 이어지는 거리의 노래는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 7기인 [[미궁의 십자로]]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