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토시/역사 (문단 편집) === 일본의 천년 수도 === [[794년]] [[헤이안 시대]]에 [[간무 덴노]]가 헤이안쿄(平安京)를 건설하여 이곳으로 천도한 이래, [[대정봉환]](大政奉還) 이후인 [[1869년]] [[메이지 덴노]]가 [[도쿄]]로 천도할 때까지 무려 1075년 동안 일본의 공식 수도였다. [[막부]] 시대에도 실질적인 권력기구인 막부가 [[가마쿠라시|가마쿠라]]와 [[에도]]에 들어선 바가 있지만, 교토는 [[천황]]이 근거하는 공식 수도였고, 정치적 입지 역시 결코 약하지 않았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쇼군의 거처 역시 교토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이 교토를 정신적 수도로 여기며 인구에 비해서도 그 위상이 매우 높다. 다만 헤이안 시대 말기였던 [[1180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에 의해 현재의 [[고베시|고베]] 일대에 위치한 후쿠하라쿄(福原京)에 약 반년간 천도한 적이 있었고,[* 당시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추구한 적극적 대외교역 정책에 후쿠하라가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천도를 감행했다. 현대 고베가 국제 무역항으로 대번성한 걸 생각한다면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안목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무리한 천도는 결국 교토 기득권층의 반발로 곧 돌아왔고 얼마 못가 헤이안쿄로 환도할 수 밖에 없었다.] 요시노 등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 당시에는 남조가 수도를 옮긴 적이 있었다. 전자는 [[고려]] 말 남경 천도와 같이 극히 짧은 기간에 그쳐 존재감이 적고, 후자의 경우 일본 전체의 수도가 아니었던 데다가 교토에 위치한 북조 정권의 실권을 쥔 [[무로마치 막부|아시카가(足利) 가문]]이 시종일관 남조 정권을 압도했기 때문에 천년 도읍의 위상을 허물 정도는 아니다. 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며 교토 역시 많은 파괴와 복구를 거쳤다. 특히 [[오닌의 난]]을 비롯한 [[센고쿠 시대]]의 잦은 전란으로 [[무로마치 시대]] 이전 수많은 고건축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재 교토에 있는 문화재들은 대부분 센고쿠 시대 말기나 [[에도 시대]] 초기의 작품이다. 이러한 난리통 속에 교토의 시가지도 다소 바뀌었는데 현재 [[교토고쇼]]는 원 헤이안궁의 동북쪽으로 옮겨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