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련 (문단 편집) === 전방입소 거부투쟁 === 당시 대학 내에서 전방 입소는 반공 교육을 통해, 사회 비판적인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로 인식되었고, [[운동권]]에서는 교련을 미제용병훈련으로 인식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이미 1971년 대학가 교련반대투쟁이 있었고. 1986년 4월 전국의 대학에서 전방입소 거부 투쟁이 일어났다. 그 해 4월 28일 [[서울대학교]]에서 [[김세진(열사)|김세진]], [[이재호(열사)|이재호]] 두명이 분신하면서 이러한 투쟁은 정점에 달하였다. 당시 군사독제체제 하에서, 모든 남자대학생들의 문제였기 때문에, 일반 학생들의 참여도 상당하였다. 결국 1987학년도부터 전방입소가 선택과목으로 변경되었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71219|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0820_19322.html|MBC]]) 그러나 말로만 선택이었지 일단 전방입소를 거부하면 병역특례 편입이나 복무단축도 불가능하고 입영연기도 취소하고 당시 졸업예정연도까지 연기되던 신검의 연기 혜택도 취소되어 입영해야 하는 일종의, 군사독재의 말기 발악적 눈속임이었다. 87년 초 당시 전방입소에 많은 학생들이 전방입소를 거부하고 다만 교련 간부 학생들만 대다수 학생들의 거부 사실과 사유 등을 해당 전방 부대에 전달하는 차원에서 입소했지만 전경을 동원한 검문 수색 등으로 인해 거의 전부 당일 0시 이전에 입소 부대로 끌려 갔다. 그리고 연병장에 라이트 켜놓고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원산폭격 등의 기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직후 [[6월 항쟁]]이 성공하고 교련 폐지가 결정되었고, 군사교육 거부자들은 같은 학점의 교양과목을 이수하면 구제되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다. 교련 1(학과 및 교내 실습 교육), 교련 2(문무대 입소), 교련 3(전방입소) 모두 한학기에 1학점 씩이었으며 2회 이상 무단결석 교관에 대놓고 반항 등 F학점 사유시에는 군사교육 거부자(학적부에 기재) 및 학변자 처리, 다음 연도에 단축혜택 없이 입영되었다. 현재 각 기업체 중견임원이나 CEO급으로 있는 당시 대학생들은 따라서 군경에 대한 거부감이 상상을 초월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