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련 (문단 편집) == 도입 배경 == 교련교육을 비롯한 학원 병영화의 시초는 1949년 [[자유당]] 정권이 학원통제와 학생 동원을 위해 만든 [[학도호국단]]이었다. 그리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해 폐지되었는데, 당시 고등학생들이 4.19 혁명의 주축인 걸 생각하면 교련 폐지는 당연한 수순인 셈이었다. 단, 학도호국단은 [[10월 유신]] 이후 부활하였다가 1986년에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던 것이, 1968년 수도 [[서울특별시]]에 대규모 [[무장공비]]가 출현해 군경과 대대적 교전을 벌인 전무후무한 사건, 즉 '''[[1.21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당장 전면전이 터져도 이상할 것 없는 극도로 긴장된 정세[* 1968년에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및 [[푸에블로호 피랍사건]]까지 터진다.] 속에, 현역병들은 '''군생활이 자동으로 최대 6개월 연장[* 당시 복무하던 [[병장]]들은 [[하사]]로 진급 후 전역했다.]되었고'''...[* 1.21 사태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기 군복무를 했던 [[예비역]]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신조도 어쨌든 전직 군인이었든 만큼, 군말없이 폭행을 감수했다고 한다(...). ]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에게도 군사교육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1969년부터 고교 필수 과목[* [[체육]] 시간을 기존 주 4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이고, 교련을 주 2시간으로 신설하였다. 당시 체육 시간이 4~5시간이었던 이유는 기초체력 향상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학력고사]] [[체력장]] 시험이 있어 체력장 연습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체육대학 및 체육교육과를 가지 않는 이상 대학입시에서 체육은 [[아웃 오브 안중]]인 21세기와 달리 당시에는 체육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체력장이라는 게 20점 만점에 기본점수가 15점에 응시만 해도 1점이 가산되어 16점이 되고 체력장 점수에 따라 17~20점이 되는 구조라 세간에 '필수과목' 운운하며 알려진 건 다소 과장적인 부분도 있다. 물론 최상위 명문대는 1점차로 당락이 결정될 정도로 성적대가 촘촘하기 때문에 아무리 기본 응시만 하고 16점만 받더라도 4점차가 무시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으로 부활한다. 그리고 1975년에는 학생회가 없어지고 학도호국단이 부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