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진교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external/80adec5081d8bdcc2f42f2db3fce461aea5b806651465ecc12e1ff55ff3b95e2.jpg]] 구 교량(앞쪽. 뒤에 보이는 교량은 [[천호대교]]) 원래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8월]] 착공해 [[1936년]] [[10월]]에 준공하였으나 1997년 3월 18일 같은 자리에 새로운 교량 공사를 착공해 [[2003년]] [[11월 4일]] 개통하였다. 광진교가 위치하고 있는 [[광나루]]는 옛부터 요충지에 있는 유명한 도선장이었고 1920년대에는 [[증기선]]으로 화물차나 버스같은 것도 도강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한번 홍수가 나면 수일간에 걸쳐 교통이 두절되어 그 불편함은 이루 헤아릴수 없었고 1930년대를 전후해서 교통량이 격증하여 하루에 도강하는 자동차, 우차, 손수레 등이 수백대에 달하게 되었으므로 도로교통의 원활한 수송을 기하고자 일제강점기인 1934년 8월 착공해 1936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이때 준공된 다리는 길이 1.037.6m, 너비 9.4m의 2차로 도로였다. 1936년 10월에 준공된 [[트러스교]] 형식의 교량은 착공과 준공시기가 한강대교 개축시기와 동일한데 개축 전의 구 한강대교의 재료가 태반이 다른 곳으로 이실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구 한강대교의 철거된 재료가 광진교의 재료로서 일부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광진교는 개축되기 전의 [[한강대교]]와 함께 [[한강]]에서 가장 오래된 교량이며 그만큼 수난도 많이 겪었다. 길이 429.5m, 너비 9.4m의 2차선 교량이었던 광진교는 [[6.25 전쟁]] 당시인 [[1950년]] [[6월 28일]], [[서울특별시]]가 함락되자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대교]], [[한강철교]]와 함께 폭파되었다가 이후 복구되었다. 그 뒤 1952년 [[미8군]]에 의해 스틸 거더 구조로 복원되면서 길이도 608m로 늘어났으나, 1960년 교각침하가 발생하여 임시 복구하였고 1972년에는 철근 콘크리트 게르버교 부위의 힌지부분을 I-Beam으로 보강하였다. 1984년 9월 대홍수로 인하여 교각의 위치가 이동하는 문제가 생겼고 이를 해결하고자 1985년 변위가 있는 교각을 강제교각으로 보강하고 1.5톤 이하의 소형차량만 통행 시켰다. [[1994년]]에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여파로 실시된 한강교량의 정밀진단에서 교량구조 안전상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진단되어 [[당산철교]]와 같이 보강 및 확장을 위해 철거하였다. 이어 [[1997년]] [[3월 18일]] 같은 자리에 새로운 교량 공사를 착공해 [[2003년]] [[11월 4일]] 개통하였다. 새로 개통된 광진교는 길이 1,056m, 너비 20m의 4차로 규모로서 한강의 교량으로는 처음으로 양쪽에 각각 2m의 자전거 전용도로와 3개씩의 발코니형 돌출 전망대를 설치하여 보행자 및 자전거 친화 교량으로 재출발하였다. 노량진에 놓인 [[한강대교]]와 함께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오는 역사가 길지만, 광진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광진교가 이렇게 외면당한 것은 서울의 확장 과정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는데, 서울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강을 넘어서는 노량진-영등포를 잇는 [[경인선]] 축으로 시가지가 발전하였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이러한 경향은 이어졌으며 현재의 [[강남3구]] 지역은 그저 논밭에 불과하여 굳이 더 많은 교량을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나마 광진교로 연결된 현재 [[천호동]]과 [[암사동]] 쪽만이 주거지였었다. 강동구쪽에서 유독 이쪽만 구획이 들쭉날쭉에 도로가 좁은 것도 그런 연유다. 그러다 [[광주대단지사건]]으로 분노에 찬 현 [[성남시]] 주민들에게 정부와 서울시가 뜨거운 맛을 본 이후에서야 서울 동부에 교량의 신규 건설을 계획했고, [[잠실대교]]와 [[천호대교]]가 연달아 개통되었다. 새로운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광주대단지에서 도심을 연결하는 시내버스가 천호동을 거쳐 광진교를 통해 넘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교통이 불편했을지 알 수 있는 단면이다. 여기에 더해 강남과 잠실 지역의 개발이 이뤄지면서 본격적으로 이 지역의 통행량이 늘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다리가 훌륭하게 이 역할을 수행했기에 낡고 좁은 광진교는 설 자리가 없었다. 1960년대 이전에는 서울의 소외된 지역의 상징이었고 1970년대 이후의 주변 개발 이후에는 아예 묻혀버린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