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주학생항일운동 (문단 편집) === 전국으로 번진 항일 운동 === 11월 10일 다시 등교하게 된 광주고보 학생들은 잡혀간 학생들의 자리를 보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날 밤 학생들은 박석기의 집에 모여 학생들을 석방하게 하기 위한 시위를 하기로 결정하고 전단을 인쇄했다. 전단에는 학생들의 석방, 식민지 교육 폐지, 교내의 경찰관 침입 금지,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었으며 11일에 시위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전단을 학생들에게 돌리며 궐기를 호소하고 약간의 시간을 갖기 위해 광주 장날인 12일로 시위를 연기했다. 대망의 11월 12일 광주고보 학생들이 거리에 전단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다. 일전의 동료로 참여했던 광주농업학교에서도 전단을 보자 학교를 뛰쳐나와 시위에 참여하였다. 전단은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뿌려졌으나 학교에서 철저하게 학생들을 통제하는 바람에 시위에 바로 참여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독서회의 주도로 학생들과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대규모로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일본 경찰에서는 광주고보학생 300여명, 광주농업학교 학생 100여명을 체포하고 시위에 참여한 학생은 전부 무기정학, 학교는 무기 휴교를 시키며 문을 닫게 했으며 이 일을 신문에 싣지 못하게 언론을 탄압하였다. 12월 3일 서울의 각 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광주 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대한 전말과 독립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는 격문이 모두 뿌려졌다.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으로 서울 지역의 조직 주동자들이 잡혀갔지만 드디어 12월 9일부터 서울 지역 학교들의 항일시위가 시작되었다. 12월 9일에는 [[경신고등학교(서울)|경신학교]] 학생 300여 명,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보]] 학생 400여 명, [[중앙고등학교|중앙고보]] 700여 명, [[휘문고등학교|휘문고보]] 학생 400여 명, 협성실업학교 학생 15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12월 9일 하루에만 1,200여 명의 시위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2월 13일까지 서울 지역에서만 1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 동맹 휴학에 참여하였고 그 중 1,40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서울 지역에서만 45명이 구속되었고 이 가운데 35명이 최종적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신간회의 도움과 보도 탄압의 해제로 전국의 학생들이 이 일을 알게 되었고 항일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목상고등학교|목포상업학교]], 정명학교, 나주고등보통학교 등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전국 320여 개교[* 심지어 [[경성제국대학]] 예과도 참여했다.]에서 54,000여 명의 학생의 참여해 1462명이 퇴학, 3,000여명이 [[퇴학]] 혹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신간회]]에서는 가인 [[김병로]], 긍인 [[허헌]], 애산 [[이인]][* 이 세 사람은 셋 다 호나 이름에 인 자가 들어가면서 조선인 인권 변호사로 활약하여 삼인이라고 불렸다. 이들 중 김병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이인은 초대 [[법무부장관]]이 되어 대한민국 사법계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신간회의 도움은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