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종(고려)/생애 (문단 편집) ==== 귀화인 우대 정책 ==== 개혁 과정에서 [[쌍기]]를 비롯한 한족계 귀화인 세력을 우대해 [[호족(한국사)|호족]]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한 뒤 쌍기에게 주기도 했는데 이걸 두고 광종에게 '내 집도 바칠 테니 그냥 쌍기에게 주라'면서 비아냥이 담긴 직언을 올린 [[서필]][* 1차 [[여요전쟁]]에서 외교로 [[강동6주]]를 얻어낸 [[서희]]의 아버지이다.]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광종은 서필의 주청에 담긴 비아냥을 알아듣고 화가 났지만 그의 말에 느낀 바가 있어 특별 대우를 줄였다고 전해진다. 서필이 유력 호족이었고, 광종에 반감을 드러내기 위해 한 말이라면 광종도 그대로 숙청했겠지만 서필이 호족이기는하나 유력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하급 관료 출신의 대쪽같은 성격에 그의 언행 하나하나가 [[촌철살인]]의 직언이 대부분이라 광종도 그의 말은 귀담아 들은 것으로 보인다. 후에 [[서필]]이 [[유신성]]과 함께 나란히 광종의 [[배향공신]]에 오른 것을 보면 광종의 최측근이었을 것이다. 당장 광종이 펼친 개혁 정책에 찬성하기도 했다. 쌍기의 아버지 쌍철은 아들이 [[고려]]에서 귀빈 대우를 받자 본인도 고려 사람으로 귀화해 고관 자리에 올랐다. 호족들을 견제한 광종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처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이러한 처우는 국내 관료들의 불만을 사게 된 원인이 되어 광종 사후 [[최승로]]의 <5조 치적평>, [[이제현]]의 <사략>에서 그를 비판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광종은 나라의 학자들 또한 기존 호족들과 연관이 있다 생각해서인지 국내 기반이 취약해 덜 위험한 귀화인들을 선호한 듯 하다. 고려 [[성종(고려)|성종]](제6대) 때 활약한 최승로는 광종의 귀화인 우대 정책과 호족 숙청을 대놓고 깠지만 국내 학자 출신 관료들이 득세하도록 길을 열어준 게 광종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