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릉비 (문단 편집) == 내용 == 높이 6.39m인 [[응회암]]에 정방형 [[예서]]로 각자하였는데 암석에 특별히 가공을 가하지 않았다. 각면 외곽에 윤곽선을 긋고 다시 세로선을 그어 행을 구분하였는데, 글자의 크기는 11 - 16cm로 대개는 14 ~ 15cm 정도다. 44행 1,775자 중 150여 자는 훼멸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1000년 넘게 야외에 방치되어 있었던지라 풍화 작용의 영향을 받은 것.] 비석이 물리적으로는 4면이지만 내용상 3부로 나눈다. 제1부는 시조 [[동명성왕|추모왕]]의 건국 설화로 시작하여 [[유리명왕|유류왕]], [[대무신왕|대주류왕]] 3대까지의 고구려 왕실의 연원과 광개토대왕 업적에 대한 칭송 등, 제2부는 연대순으로 기록한 광개토대왕의 훈적, 제3부는 그 수나 출신 등 수묘인에 관한 사항과 수묘인 제도와 법의 공표 등으로 구성된다. 비문의 내용상 분명히 광개토대왕의 능 근처에 본 비석을 세웠을 테지만, 인근 왕릉은 전부 [[도굴]]된 지 오래라 정작 아직까지 어느 능을 가리키는지를 모른다. 인근에 위치한 [[태왕릉]]이나 [[장군총]] 중 한 곳이라고 추측하지만, 양쪽 모두 도굴과 훼손으로 피장자의 신원을 알 수 없다. 2부 훈적 부분은 모조리 굴복하지 않거나 쳐들어온 적을 쳐부순 무훈의 열거로 이뤄진 점에 특색이 있다. 연대순으로 나열하여 ①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한 경우와 ② 군사를 파견하여 벌한 경우로 나누어 확실하게 명시했다. 그리고 각 기사는 모두 토벌 대상 세력이 어떠어떠한 잘못을 저질러 구실을 제공하였으니 이에 벌하였다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성은 3부의 수묘인 부분과 결부하여 전체를 하나의 맥락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광개토왕 이래 수묘인을 정벌한 세력에서 끌어온 속민으로 두도록 했으므로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은 곧 수묘역 제도를 지탱하는 토대였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