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릉비 (문단 편집) === 비문 조작·변조설 === [[1970년대]] 이후 [[재일교포|재일]] 사학자 이진희[* 그의 아들과 함께 1996년 [[페루 주재 일본대사관 인질사건]] 당시 인질로 잡혔다가 풀려났다.]가 '사코우 카게노부가 신묘년조 기사를 변조한 탁본을 제작하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비석 표면에 [[석회]]를 도포하였다.'는 조작설(석회도말론)을 주장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석회를 바른 이유가 글자가 훼손됐기 때문이라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고 해서 아예 글자를 가려버리는 행위 자체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 육군참모본부 주도로 광개토왕릉비를 훼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주장은 이후 일본이 직접 개입했다는 물증이 없고,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중국인 민초들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설(아래 서술한 부분 참조)이 나오며 상세한 진위를 알 수 없게 되었으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은 사람의 손이 닿았고 몇몇 글자가 변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진희의 석회도말론은 변조 주체를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 뜬 원석탁본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는 의의를 지닌다. 실제로 이후 원석탁본들을 바탕으로 수많은 비교연구가 진행되었고, 현재 학계의 통설은 이런 추가 연구로 다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많은 사람의 오해와 다르게 뜨거운 감자인 신묘년조와 관련해서는 한중일 3국의 탁본 비교 연구에서도 별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즉, 하술할 신묘년조 논쟁과 비문 조작 논쟁은 별개의 것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좌)변조 (우)왕건군,주운태.jpg|width=100%]]}}}|| ||<:>{{{#000000 쌍구가묵본에서 변조된 문자(좌)와 80년대 주운태가 제작한 탁본의 문자(우)[br]{{{-2 쌍구가묵본의 경우 한눈에 봐도 인위적으로 윤곽을 뚜렷하게 만들었음이 드러난다. 우측은 있는 그대로 탁본했기 때문에 쌍구가묵본에 비해서 윤곽이 흐리다.}}}}}} || 가장 유력한 변조 사례는 영락 10년 기사의 왜만왜궤(倭滿倭潰) 부분이다. '왜만왜궤'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소장하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의 글자로, 변조되기 전의 원형은 '왜구대궤(倭寇大潰)'가 유력하다. 원래 문구로 추정되는 '왜구대궤'는 '왜구를 크게 궤멸 시켰다” 해석되고, 변조 문구로 추정되는 '왜만왜궤'는 '(성에) 왜가 가득하였고 그 왜가 (성을) 무너뜨렸다'로 해석된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14/2014101400104.html|#]] 쌍구가묵본은 비문에 종이를 대고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종이 너머로 윤곽을 가늠한 뒤 먹을 칠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모사자의 가치가 개입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므로 쌍구가묵본은 탁본이 아니다. 반면에 탁본은 의미불명한 문자나 흠집이 있어도 그대로 두고 본뜨는 것[* 즉 자신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확증편향으로 글자 윤곽을 만들 가능성이 있는 쌍구가묵본에 비해 자신의 주관이나 선입견을 배제하기에 더욱 객관적인 방법이다.]이다. 여기에는 일본육군참모부에서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작법 특성상 연구자 또는 작업자 개인이 자의적으로 수정했을 수도 있으며, 오독으로 의도치 않게 고쳐졌을 수도 있다. 1980년대에 랴오닝 성 박물관장이었던 주운태는 일본이 개입한 행위가 아니라 일반인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왕젠췬(王健群; 왕건군)은 '비석에 발린 석회는 해당 지역 주변에서 탁본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국인 초천부(初天富)・초균덕(初均德) 부자(父子)가 탁본을 더 쉽게 뜨기 위해 울퉁불퉁하거나 갈라진 곳에 채워넣은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점은 초천부 초균덕 부자가 일개 소시민일뿐 한학이나 금석학 고문자와 아무 일가견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그도 그럴것이 당대 고구려어로 작성된 릉비는 문법도 중국어와 다르며 간간히 [[이두]]도 있는 등 중국 소시민이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인이어도,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이는 이런식으로 글자를 자의적으로 고칠수 없다는 주장도 있으며, 무엇보다 쌍구가묵본 자체가 탁본으로 인정 되지 않으며, 파손된 문자를 자의적으로 해석할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제작된 문서다. 또 이는 신묘년조 기사만큼 민감한 부분은 아니지만, 그 내용과 맥락상 왜군의 세력규모와 신라를 어느정도 규모의 군사로 잠식 시켰는지 짐작할수 있는 구절이므로, 조작된 네글자의 가치가 가볍다고 여길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선 초천부 부자에 의해 개찬 되거나 변조 되었을 가능성을 낮게 보며, 남은 가능성을 일본 관동군 소속 종군 고고학자/사학자의 소행으로 본다.[* 그러나 선술한 쌍구가묵본이 위조 된 것인지, 아니면 릉비에 석회를 발라서 위조 한 것인지는 불명하다. 왕건군의 경우에는 초천부 초균덕 부자의 소행으로 보기 때문에 그는 쌍구가묵본이 아닌 릉비가 훼손 날조 되었다고 짐작하는 것 같다.] 본론으로 들어와서 주운태의 탁본은 왕건군에 의해 석문 되었고 그는 倭寇大潰로 판독했다. 결국, 쌍구가묵이든 혹은 광개토왕릉비의 금석문이든 자료가 어떤식으로든 날조,개찬 되었다는게 한중일 삼국 학자들의 결론이다. 다만 신묘년의 기사는 현재까지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개찬되지 않았다는게 중론이다. ||[[파일:다운로드 (66).jpg|width=100%]]||[[파일:쌍구가묵본 날조논란.png|width=100%]]|| ||주운태가 제작한 탁본을 기반으로 한 왕건군의 석문. 동그라미 쳐진 부분은 기존의 해석과 다른, 새롭게 판독된 문자들이다. || 여러 학자들의 판독을 정리한 표.주운태의 탁본과 왕건군의 석문 이후로는 ‘왜구대궤’로 판독하는게 일반적이다. [* 출처: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 김태식 18쪽[[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 괄호는 다른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판독이다. 이로써 쌍구가묵본을 토대로 석문[* 탁본이나 그와 비슷한 작업으로 복사된 글자를 보고 학자 각자가 의견을 내놓으며 해석하는 작업.]하여 '왜만왜궤'라고 해석한 일본 학계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되었다. 왜구대궤라고 풀이할 경우 해당 문장은 다음과 같이 달라진다. >(從)新羅城(宮)城倭__滿倭__潰城(內)□□(盡)□□□安羅人戍兵 {{{-1 (쌍구가묵본)}}} >(從)新羅城(宮)城倭__寇大__潰城(內)□□(盡)□□□安羅人戍兵 {{{-1 (비교연구본)}}} 왕건군의 석문은 노태돈 이형구[* 특히 이형구는 이런 변조 행위가 일본군에 의한 소행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학자이며, 2014년에도 주장했다]손영종 임세권 등에 의해 지지를 받았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최근에도[*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2009)에도 이러한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왕건군의 주장을 무시한채 아직도 왜만왜궤로 해석하는 트렌드가 강하다. 이 문구는 신묘년만큼 민감한 부분은 아니지만 신라를 약탈한 왜구의 규모를 짐작케 할수 있는 문장이므로, 이 날조된 (혹은 변조된) 문장이 지닌 가치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209p.]] 이 사건으로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에서 객관적인 실체를 탐구하려는 태도가 재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