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릉비 (문단 편집) === 왕릉비 부정론 === [[역사학자]] [[주보돈]] 등 일부 학계에서는 이 비석이 (능)[[묘비]]의 형식을 일부 갖추긴 했지만 묘비로 단정하기 힘든 요소가 많다고 주장했다. * (왕릉비라면) 무덤의 주인공일 광개토왕의 신상에 앞서서 시조의 출자와 함께 고구려의 건국 과정을 주로 소개한 점. * 이후 2대 [[유리명왕|유류왕]]과 3대 [[대무신왕|대주류왕]]까지 밝힌 뒤 일반적인 묘비의 관례로는 당연히 들어가야 할 무덤 주인공의 조부([[고국원왕]]), 부([[고국양왕]]) 등 직계 존속의 세계를 전혀 밝히지 않은 점. * 비문 안에서 '이에 비를 세워 훈적을 새김으로써 후세에 드러내어 보인다(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고 해서 비석을 세운 목적을 단순히 훈적(勳績) 기록에 무게중심을 둔다고 명시한 점. * 비문의 내용이 수묘연호(守墓煙戶)에 비중을 크게 두고 있는 점. * [[파일:태왕릉과 광개토대왕릉비.jpg|align=center]] 광개토왕릉을 확정짓기 힘들 정도로 주변 능묘들과 이 비석이 멀리 떨어져 있는 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능비/묘비는 무덤 곁에 세트로 같이 세우는 게 일반적인데 그나마 근처에 있는 [[태왕릉]]과 [[장군총]]도 거리도 좀 되며 배치 방향도 부자연스럽다. * 고구려에서 능비/묘비를 세운 다른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점. 고구려에서는 [[안악 3호분]], 덕흥리 벽화분, 모두루묘의 사례처럼 묵서의 형식을 빌린 묘지(墓誌)의 존재는 확인되지만 묘비를 세운 사례는 이 것 외에는 흔적도 없다. 예를 들어 [[신라]] 같은 경우 내용까지 어느 정도 온전하게 남아있는 왕릉비는 [[문무왕릉비]]뿐이지만 비석이 훼손되고 남은 파편은 다른 왕릉에서도 상당히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면 [[흥덕왕릉]] 문서에 있는 사진처럼 말이다. 즉 신라는 비록 지금은 세월이 흘러서 조금밖에 안 남아있어도 당시에는 대부분 왕릉에 왕릉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 비석 외에는 왕릉비를 세우는 문화가 있었다는 흔적 자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 비문에서 무덤을 뜻하는 산릉(山陵)이란 표현이 보이지만 이것이 개별 능묘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