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릉비 (문단 편집) == 여담 == * [[김진명]]이 소설 『몽유도원(구판 : 가즈오의 나라)』에서 광개토왕릉비 조작설을 소재로 다루었다. * [[야스히코 요시카즈]] 화백의 작품 [[하늘의 혈맥]]이 광개토왕릉비를 침략 정당화를 위해 이용하려는 일본 군부와 극우 세력들의 시도를 묘사했다. * [[예술의 전당]]과 [[태광그룹]]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서예명적(韓國書藝名蹟) 법첩[* 法帖. 서예가들이 옛날의 잘 쓴 글씨들을 감상하고 따라 쓰기 위해 글씨들을 수집한 모음집. 원래는 일일이 [[탁본]]하여 모으거나 탁본한 글을 다시 목판으로 찍어 만들었지만 지금은 당연히 평범하게 인쇄한다.] 15권을 완간했는데, 이 중 첫 번째 권이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씨이다. 왕릉비가 비단 역사적 유물로서만이 아니라 [[서예]]작품으로서도 주목할 만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서체]] 고예와 [[전서체]]를 섞은 특유의 서체가 인상적이라 한다. [[https://m.blog.naver.com/kalsanja/221116880034|〈광개토대왕비〉 서체의 독창성과 한국서예사적 가치]] * [[대한민국 국방부]]와 [[한글]]서체 디자인 업체인 [[https://hangriafont.com/|한그리아]]가 약 1년동안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씨체를 분석하고 공동 개발하여 [[https://blog.naver.com/mnd9090/221023344796|호국체]]를 만들었다. [[고구려]] 글씨체의 전통을 후손들이 이어받아 현대화한 것이다. 어찌 보면 [[국가기관]]에서 만든 [[한글패치|광개토대왕릉비체의 공식 한글판]]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글꼴이 한글은 지원하는데 정작 [[한자]]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다루었듯이 광개토대왕릉비의 한자 서체는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정작 호국체에서 한자 지원이 안되는 것은 팥빵을 만들 때 팥을 넣지 않는 격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수만자에 달하는 한자를 디자인하기 위해 글꼴 제작 비용이 수 배로 상승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안그래도 돈 부족하다는 국군 입장에는 한글만 만든 것도 이해가능하기는 하다. 인명용 한자 등 자주 쓰는 한자만 만든다고 하더라도 글꼴 제작 비용이 2배는 상승한다.] 호국체는 상시 [[무료]]로 배포하고 있으며 상업적인 이용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 광개토왕릉비에서는 고구려의 태자를 세자로 칭하고 있어, 중국과의 조공 책봉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외교 자세를 취한게 아니냐는 추론이 있지만, 일본서기에도 자국의 태자를 세자라고 전하는 기록이 백제삼서를 통해 차용 되어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자국내에서도 태자와 세자를 혼용한게 아닌가라는 추론을 할수 있다. >是歲, 高麗大亂. 凡鬪死者二千餘 【百濟本記云, 高麗, 以正月丙午, 立中夫人子爲王. 年八歲. 狛王有三夫人. 正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 其舅氏麁群也. 小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狛王疾篤, 細群·麁群, 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 二千餘人也.】 >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백제본기》에서 "고구려에서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박왕(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다. 정부인(正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麁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박왕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 >《일본서기》 546년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