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 (문단 편집) === 태왕릉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image.interpark.com/20120309155617927.jpg|width=100%]]}}}||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확실하진 않으나 집안시에 위치한 [[태왕릉]]으로 추정된다. 확증할만한 근거는 없으나 광개토대왕릉비 주변에 왕릉이라 할 만한 무덤이 장군총과 태왕릉 정도밖에 없어서 둘 중 하나가 광개토대왕의 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엇보다 비 옆에 있는 위치도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큰 무덤 크기는 곧 왕의 위상을 지칭하기도 때문에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비를 건설했다고 전해진다면 무덤도 대대적인 공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호태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동탁(銅鐸)이 출토되기도 했는데, 이 호태왕이 일반명사인지 광개토대왕을 특정한 용어인지 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그러한 바 그 사실만으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말하진 않고, 오히려 태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동아시아 광역 편년 체계 속에서의 시간적 위치, 그에 따른 [[적석총]] 형태의 변화 등을 고려하여 볼 때, 태왕릉 출토 유물들은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정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서 '''태왕릉은 대체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교적 소수론이지만 [[태왕릉]]을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이런 경우에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장군총]]이라고 본다. 하지만 태왕릉 출토 유물들은 태왕릉 묘실이나 봉토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태왕릉의 능원 내에서 출토된 것으로, 도굴되었던 시점에 도굴꾼들이 나중에 가져가려고 퇴장한 것인지 아니면 태왕릉에 있었던 의례행위의 결과로 남은 것인지는 불명확하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화랑세기]]》의 저자 [[박창화]]는 〈광개토대왕릉비〉를 [[고려]]에서 뽑아다가 현재의 위치에다 박아놓은 거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