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학파 (문단 편집) == 한계 == 사람들 사이엔 '관학파 = 훈구파'라는 등식이 널리 퍼져있어서 사림파가 관학을 몰락시키고 성리학 원리주의 국가를 만들었다고 사림파를 만악의 근원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위에서 말했듯 훈구파는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신집단을 이르는 말이며, 관학파 = 훈구파인 것도 아니다. 관학파 중에서도 계유정난에 반대해 후일 사림파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사림파들 역시 자주적인 의식을 가진 이들도 많았으며, 사대를 강조한 것은 조선이 명나라에 험악한 관계로 지내봤자 좋을게 없으니 그런 것에 가깝다. 또한 당시에는 일반 민중들에게 유교 규범이 널리 퍼지지 못해 불교와 결합된 토속 신앙 미신과 도덕 규범에 어긋나는 일이 팽배했기에 유교를 사회 곳곳에 퍼트려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집중하느라 그런 이미지가 씌워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실무분야의 능력에서도, 사실 [[성균관]]이나 [[향교]] 역시 어차피 서원과 같은 유학 커리큘럼인 것은 다름 없어서 특별히 체계적으로 실무 능력을 배양하거나 이러한 인재를 육성하는 절차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외교적인 부분에서 쓸모가 많은 사장을 중시했다거나 하는 점이 언급되고, 무엇보다도 이후의 사림파가 임금을 도와 국정을 보좌하는 관료, 아주 쉽게 뭉뚱그리면 실무 담당 행정가라기보다는 '철학자에 가까웠다는 것'이 문제다. 실무 능력이 뛰어났다고 하려면 수학이나 행정학처럼 과거시험에서 안보는 학문들을 중시했다는 소린데, 수학은 고려시대부터 너무 어려워서 기피학문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장난이 아니라 진짜 사실이다, 고려사만 봐도 토지에서 세금을 걷을때 자잘한 단위를 계산하기 귀찮아서 그냥 생략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체계적인 행정학은 20세기에 생겼다. 윗문단에서 사림파가 철학자들이 가깝다고 하는데, 이때는 국가의 이념 철학=통치행정이었던 시절이다. 성종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삼사(조선)|삼사]]로 대표되는 [[청요직]]이 실무외적인 부분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초임 관료시절부터 행정실무나 외정, 군정보다는 중앙정부에서 말발을 세우는 것이 엘리트코스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이럴 수 있는 배경이 바로 학맥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붕당]] 정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사림파 고위 대신들의 행적을 보면 잠깐 돌고 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실무 경험이 하나도 없는데도 고위관직으로 나가는 신기한 모양새가 자주 발견된다. 중앙내직의 비실무직만으로도 고위 관료가 되는 것이 가능하고 이걸 엘리트코스 취급한 것이 조선시대 사림파 집권기의 모습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그렇다고 관학파 중에서도 사림파로 이어진 경우가 있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서인-노론계열로 이어질 기호학파의 경우 아예 관학파와 훈구파에 사림파가 합쳐져서 형성되었으며, 퇴계 이황의 본관으로 조선 주자학의 아성이었던 영남학파만 해도 기호학파만큼은 아니지만 유방선 등의 관학파들의 영향력이 꽤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학맥으로 이끌어주는 이런 루트가 없어서 외직도 하고 실무도 거치고 군사 경험도 있는 초기 관학파들이 현장경험 때문에 실무능력으로 인정받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