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직 (문단 편집) == 관직에 따른 대우 == 한반도의 경우, 시대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문관직이 무관직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의 문관직은 종1품까지[* [[중서문하성]] 소속 [[문하시중]].] 있었지만, 무관직이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는 정3품까지[* 응양군 소속 상장군.]였고 조선 시대에도 과거 제도 중 무과는 문과보다 격이 낮았던 데다가 고려와 마찬가지로 무반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는 정3품까지였다.[* 다만 조선에서 정2품부터는 문·무반의 구분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무반이 문반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조선은 설립 배경 자체가 쿠데타인지라 조선 왕가와 사대부들은 제2의 이성계가 나오는 것을 굉장히 히스테리적으로 경계를 했다. [[이순신]] 장군이 당시 조정에 천대를 받고 견제를 받은 것도 이러한 사상이 이어져 온 것이다보니 무반의 인물이 너무 잘해도 조정에서는 위험하게 생각하는 약간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기는 했다.] 고려에서는 전시에 삼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에 문관을 임명했기 때문에 무관직 출신의 장수들은 항상 문관의 지휘를 받으며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논공행상에서는 당연히 총사령관이 가장 높은 공을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 밑에서 전쟁을 수행한 무관직 장수들은 아무리 뛰어난 공을 세워도 기껏해야 3품 상장군까지 출세하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현종 시절에는 백관의 녹봉 지급을 위해 경군의 영업전을 회수하여[* 경군은 고려의 중앙군을 이르는 말이고 영업전은 고려 시대에 국가에서 양반과 군인 등에게 지급했던 토지였는데 경군의 영업전 회수는 경군을 지휘하는 고려의 고위 무관직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녹봉으로 지급하자 김훈-최질 등이 반란([[김훈·최질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 있었으며, 의종 시절에 이르러 무관직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불만이 폭발한 장수들이 반기를 들어 [[무신정변]]이 일어나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을 정도였다. 무신정변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이소응 사건은 당시 고려 시대의 공직 사회에서 무관직에 대한 인식과 대우가 어떠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조선은 고려보다는 무반에 대한 대우가 나은 편이었으므로 차별대우로 인해 무신정변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학문을 중시했던 조선의 양반들은 과거 시험에서 무과보다는 문과를 높게 여겼고, 무과는 상대적으로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조선 무신들은 고려와는 다르게 일부는 정승에 오른 경우도 있었고 적어도 판서를 하는 경우는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