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음사(제주) (문단 편집) == 역사 == 창건자 및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의 12개 사찰 중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다. 제주의 민담, 설화, 전설 등에 등장하는 괴남절[* 관음사의 제주방언], 개남절, 동괴남절, 은중절 등의 이름을 예로들어 멀리는 [[탐라국]] 시대에 이미 해로를 통해 남방불교가 들어와 관음사가 존재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렇듯 제주도의 고찰로 명맥을 이어오던 관음사는, 제주에 잡신이 많다 하여 [[조선]] [[숙종(조선)|숙종]] 때 제주 [[목사]]였던 이형상(李衡祥)이 많은 사당과 함께 사찰 500동을 폐사하였을 때 폐허가 되었다. 현재의 관음사는 [[비구니]] 안봉려관(安逢麗觀)이 승려 영봉(靈峰)과 도월거사(道月居士)의 도움으로 1908년에 창건한 것이다. 지역민의 반대에 부딪쳐 시련을 겪었으나 안봉려관 스님은 3년 토굴[* 혜월굴이라고 하며, 현재도 관음사 경내에 4.3유적지와 더불어 남아있다.]에 은거하며 사찰 재건에 힘을 쏟았다. 처음에는 법정암(法井庵:관음사의 전신)이라 하였으며 창건 당시 [[불상]]과 탱화는 용화사(龍華寺)와 광산사(匡山寺)에서 옮겨 왔다. 모처럼 재건된 관음사는 1939년 화재에 이어 제주 현대사의 아픈 상처인 제주도 [[4.3 사건]]의 광풍을 마주하게 된다. 한라산 중턱에 위치한 탓에 유격대와 군 토벌대의 치열한 격전지로 전락한 관음사는 국군에 의해 완전히 불태워지고 군주둔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당시의 터가 남아있다.] 토벌대에 의해 모두 소실된 관음사는 1968년 복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