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성대제 (문단 편집) == 역사 == 관우는 충의와 무용의 상징으로 명청 이전에도 민간에서 숭배되어 왔으며 왕실 뿐만이 아닌 세간에서도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불리는 등 신(神)으로 추앙받았고 그 중에서도 무신(武神), 재신(財神)으로 해석되어 왔다. [[도교]] 역시 관우를 만력제가 추존한 봉호와 똑같은 제호인 '협천대제(協天大帝)'로 존칭했고 이 외 자체 존호인 복마대제(伏魔大帝), 익한천존(翊漢天尊) 등으로 높여 부르며 [[유교]]에서도 문형성제(文衡聖帝)로 존칭, [[불교]]의 경우에도 호법신[* 불교를 수호하는 신들을 일컫는 말.]의 하나로 모셔지는 등 종교 민간 빠짐없이 존경을 받아 왔다. 이처럼 민간에서도 널리 퍼진 관우의 명성은 중국 역대 왕조에서도 그의 [[신성]]함을 인정하게 되었고 신성함의 주요 요소인 충의(忠義)는 역대 왕조의 군주들에게 이상적인 신하의 예시로 받아들여졌기에 관우를 전용 묘(廟)에 배향하고 죽은 지 몇 백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작위를 봉하는 등 지속적인 우대를 해왔다. 관우의 작위는 [[촉한]]에서 내린 장무후(壯繆侯), 즉 [[오등작]]의 2위인 후작에 불과했으나 죽은 지 천년도 더 지난 북송 시기인 1102년 충혜공(忠惠公)으로 추봉되어 오등작 중 1위의 작위를 얻었고 숭녕지도진군(崇寧至道真君)이라는 신호(神號)로 추봉되더니 남송 말기엔 장무의용무안영제왕(壯繆義勇武安英濟王), 즉 왕(王)에 이르렀다. 이전에 신선에 봉해졌으므로 이 시기부터 관우는 신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문종(원)|원문종]]의 경우 관우를 위해 대장군(大將軍), [[절도사]] 등 명예직에 불과했으나 자신의 세력을 가질 수 있는 직위에 추증했으며 무영후(無佞侯) 및 이전 송나라에 내린 왕호를 그대로 봉하는 등 황제 바로 아래의 작위를 봉하여 우대하였다. 이후 [[명나라]]의 [[홍무제]] 시기 전장군한수정후(前將軍漢壽亭侯)로 강봉되었으나 [[만력제]] 시기 협천호국충의대제(協天護國忠義大帝), 즉 이전 왕조의 봉호와는 격이 다르며 생전 본인이 모셨던 주군 [[유비]]와 동급인 '''[[황제]](皇帝)'''로 봉해졌고 동시에 신호 역시 진군에서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격상되는 등 이전 왕조가 모셨던 정도와 격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시기 최종 신호는 천존(天尊)[* 천존은 불교에선 부처의 이명(異名)이고, 도교에선 [[원시천존]] 같은 도교에서 가장 높은 신에게 붙는 존칭이다.]으로 이미 청나라 전에도 신령들 중에서도 거의 최고등급으로 추앙되었다. [[청나라]] 시기 21세기 관우의 공식 제호인 관성대제의 전신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로 황제로서의 지위는 유지한 채 시호가 개칭되었고 1725년 [[옹정제]]의 특혜로 관우의 증조부, 조부, 부친이 공작(公爵)으로 추봉되었다. 이후 이들은 다시 왕(王)으로 1급 격상되었으며 관우의 시호는 계속해서 증가하였고, 최종적으로 [[광서제]] 시기 마지막 시호인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제군(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帝君)으로 추존되었다. 다만 신호는 천존에서 제군(帝君)으로 다소 강봉되었다. 중국 본토에서 광서제가 관우를 마지막으로 추봉했다. 한국에선 [[대한제국]] 시기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로 추존하였다.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 후기-일제시대까지는 우리나라에서도 관우 신앙이 상당히 강했기 때문에, 고종이 관우에게 시호를 올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명성황후]]가 신뢰했다는 무당 [[진령군]](眞靈君) 또한 '관우의 딸'이라 자칭할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