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롱집단 (문단 편집) == 관롱집단이 굴기한 원인 == [[무제(전한)|한 무제]] 때 오직 [[유학]]을 높인 이래로 [[한나라]] 조정에는 경학으로 재능을 감별하였고, 경학자들이 조정에 들어와 관료가 되어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함으로써 계속 관리가 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가족에게 대대로 전해져 왔으며, 대대로 경학을 익힌 자만이 대대로 공경(公卿)이 되었으므로 [[후한]] 사회에는 이미 대대로 관리가 된 명문귀족이 출현하여 사족(士族), 또는 세족(世族)의 전신이 되었다. [[위(삼국시대)|조위]]와 [[서진|진나라]]에 이르러 [[구품중정제]]가 실행되자 출신과 성씨가 인재 등용의 중요한 요건이 되었으며, 사족들의 관직 독점과 세습이 강화되어 '상품(上品)에는 한문(寒門)이 없고, 하품(下品)에는 세족이 없다'는 현상이 나타났다.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각 왕조는 문벌들의 지지에 의존하지 않고는 안정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서진 왕조가 조위의 황제를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성립된 이후로 이후 남북조시대의 왕조들은 대부분 그다지 정통성을 내세울 여지가 없는 왕조들이었다. 애당초 집권의 명분이 없었던 서진은 부족한 정통성을 채우기 위해 명문 사족들의 세력을 인정하고 그들의 지지를 갈망할 수밖에 없었고, 가문의 격을 중시하는 풍조가 이로 인해 조장되었다. [[팔왕의 난]] 이후 북조의 이민족 왕조들은 물론, 남조의 여러 왕조들 또한 대부분 찬탈자들이자 원래 가문의 격이 낮은 군인 출신들이 벼락출세한 경우였으므로 더더욱 그러한 기존 세족들의 지지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문 중시의 사회 환경이 관롱집단 굴기의 기초가 되었다. 관롱 지역에서 서위 정권을 공고히 하고 국력이 비교적 강한 동위에 대항하기 위해 우문태는 관롱 위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산동(山東)과 강좌(江左)를 다시는 한화(漢化)의 중심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였다.[*A] 관중 지역이 [[주나라]] 이래로 문화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선전하였고, 효문제의 한화 정책을 대거 답습하였으며, 관중사족을 중용하여 동위가 한화를 배척한 것과는 다르게 되었다. 호한융합의 결과 우문태를 따라 서쪽으로 들어간 선비인과 선비화된 한인이 최종적으로 한화되었고, 민첩하고 용맹하며 상무적인 민간 풍조가 관중사족에게도 스며들어 문무합류(文武合流)와 사인(士人)들이 문과 무에 동시에 능한 기풍이 관롱집단의 큰 특징이 되었다. 이는 관롱집단이 남북조에서 성행한 세족정치 중에서 신속하게 굴기하도록 했으며, 결국 북주, 수나라, 당나라가 가장 강대한 정치적 역량을 펼치게 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꽤 무인정치의 특징이 있었고, 이후 [[송나라]]의 문인정치 특징과는 현저하게 달랐다. 사인들에게 문무겸비를 요구한 기풍은 무주 시기 과거제가 대두한 이후 점차적으로 쇠퇴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