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롱집단 (문단 편집) === 쇠약과 종결 (무주에서 당나라 후기까지) === 태종이 죽은 뒤 관롱집단의 수장 격인 [[장손무기]]는 스스로 [[고종(당)|당 고종]]을 옹립한 공을 믿고서 전횡하며 정적을 배척하였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고종의 총애를 얻었고, 고종은 황권의 강화를 위해 원래의 황후 왕씨를 폐하고 측천무후를 세우는 등 사건을 연달아 일으켜 이를 이용해 장손무기를 타도하여 정권의 핵심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측천무후는 비록 관롱집단 출신과 관계가 있었지만 선조의 본적이 병주(幷州) 문수현(文水縣, 현재의 [[산시성(산서성)|산시성]] 원수이현)에 있어 관롱집단의 전통적인 지리 범위에서 벗어났으므로 가계상으로 소원하였다. 측천무후의 모친 양씨(楊氏)는 수나라 종실 출신이지만 측천무후의 부친 무사확(武士彠)은 원래 상인으로 고조가 당나라를 세우는 데 공이 있어 봉작을 받았지 관롱집단의 세족 배경이 없었다. 따라서 측천무후는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시 당나라의 핵심이었던 관롱집단을 와해시키는 데 착수하여, 그 일환으로 혹리를 채용하였고, 진사(進士), 문사(文詞), 시부(詩賦)의 과(科)를 숭상하였고, 문무(文武)를 분류(分流)하였고, 관롱집단이 정권을 장악한 데 불만을 품은 사인(士人)들을 등용하였다. 당시 과거제는 시행되고 있었지만 향시에 급제한 자로서 고위직에 오른 자가 적었고, 주요 권직은 여전히 관롱집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측천무후는 적극적으로 향시 및 진사에 급제한 자를 임용함으로써 그러한 국면을 곧 타파하였다. 이후 측천무후가 중병에 걸리자 장간지(張柬之) 등은 [[중종(당)|당 중종]]을 복위시켜 무주를 폐지하였고, 당나라 황실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개원 연간([[713년]] ~ [[741년]])에 [[현종(당)|당 현종]]은 무주 때 승진한 향시 합격자를 계속 임용하였지만 천보 연간([[742년]] ~ [[756년]]) 이후로는 점차적으로 이림보(李林甫) 등의 세족들을 고위직에 발탁하여 어느 정도 관롱집단의 통치가 회복되었다. [[안사의 난]], 우이당쟁(牛李黨爭)을 거치면서 관롱집단의 우월적 지위는 급속히 하락하였고, 과거 출신자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는 상황이 갈수록 보편적으로 변했다. 이에 더하여 당나라 후기의 환관들이 정치에 간섭하였고, 심지어 병권을 장악하고 황제를 폐립하는 등의 일은 모두 관롱집단의 영향력을 더욱 쇠약해지게 했다. [[황소의 난]] 이후 수백 년을 이어온 사회계급이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무너지자 전통적인 사족들은 거의 붕괴하였고, 지방의 번진 세력들이 굴기하니 문벌정치는 더이상 지속되지 않았고, 관롱집단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