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동주청 (문단 편집) == 상세 == 1905년 9월 26일 [[천황]] 직속 기관인 관동[[총독부]]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1906년 관동도독부로 개조되고[* 도독이란 군 사령관과 주장관을 겸한 지위였다. 또한 천황 직속이었던 총독부 시대와는 달리 도독부로 개조되면서 정무와 군무에 대해 외무대신, 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 육군교육총감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 이후 만주통치는 관동도독부와 영사관(외무성)과 만주철도주식회사에 의해 맡겨지게 되었으나 각각 권한을 주장하고 행정의 일원화를 방해하게 된다. 1910년 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척식국이 폐지되자 관동도독부는 군기사항을 제외하고 다시 외무대신의 지휘감독하에 두게 된다. 제2차 오쿠마 내각시대에 이르러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일본이 중국에 대화 21개조를 요구하는 등 강경 자세를 취하면서, 관동도독부로 관동주의 행정을 일원화시키자는 제안이 이루어지고, 또 제2차 만몽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등 활동이 활발화됬다. 1917년, 테라우치 내각의 시대가 되면, 육군 출신의 테라우치 내각총리대신 하에서, 현안이었던 관동주의 행정 일원화 문제에 대해 관동도독부에 유리한 해결이 이루어져, 재만주국 일본영사가 관동도독부의 지휘하에 놓였다. 더욱이 척식국이 부활하자 외무성과 외무대신의 권한은 다시 축소됐다. 또 관동도독부 관제 개정에 의해 관동도독은 내각총리대신의 감독하에 놓여지고 만철 총재도 겸임되게 되는 등 관동도독부의 권한은 다시 강화되었다. 1919년, 데라우치 퇴진에 의한 육군의 약체화와 외무성의 강화, 거기에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하는 시대의 풍조로 인해, 관동주의 민정으로의 이행 등을 정한 관동청관제가 공포되어 관동도독부는 폐지되어 군사와 정치가 분리되었다. 관동도독부 직속의 수비대와 남만주철도의 부속지를 경비하는 수비대는 관동군에, 민정 부문은 관동청으로 분리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관동군은 대만군 · 조선군 ·지나주둔군과 나란한 독립군이 되었다. 1934년에는 [[만주국]] 수도인 [[신징]]([[장춘]])의 일본제국 영사관에 [[남만주철도]]를 관리하는 관동국(関東局)이 설치되었으며 관동주를 관리하는 관동청은 관동국 산하의 관동주청으로 개편된다. 1919년까지는 [[군정]]체제라서 무관이 도독을 해야 했으나 이후 무관이 아니더라도 관동장관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초기엔 무관이 아닌 사람이 관동장관이 되기도 했다. 관동주청 청사 건물은 현재 다롄시 인민정부청사로 쓰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