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동군 (문단 편집) == 폭주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Kwantung_Army_Special_Maneuvers2.jpg]] 관동군은 일본 제국 육군 소속으로 [[대만군(일본 제국)|대만군]], [[조선군(일본제국)|조선군]], 지나주둔군, 본토 사단과 동등한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 직속 부대였다.[* [[대일본제국 헌법]]은 식민지 등의 외지에도 적용돼서 조선도 일본 헌법이 적용되었고, 일본 헌법의 범위 안에서 천황의 칙령으로 조선 내 입법, 행정, 사법권을 위힘받은 조선총독은 총독부령 등 하위 법령을 입법할 권한이 있었다. 다만 제국의회에서 예산배당을 하기에 총독부가 초창기에는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가능한한 조선 내에서 예산을 확보하여 내각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3.1 운동 등에 의한 세출의 증가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정당내각의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 확보 시도,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의 내각과의 협조 시도 등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의 독립성이 줄어들기도하였다. 예산과 내각의 의지에 의해 총독부의 독립성은 제한적이었다.]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의 상급지휘부인 [[대본영]]이 설치된 후로는 참모본부를 통해 대본영의 작전지휘를 받았다. 관동군은 관동주를 거점으로 호시탐탐 중국 침략을 노렸고 1927년 [[1차 산동파병]]을 통해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저지하고자 했으며 1928년에 [[황고둔 사건]]을 일으켜 [[장쭤린]]을 암살하고 [[장제스]]를 배후로 지목하여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려 했으나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이 [[동북역치]]를 선포하고 국민당에 합류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관동군 과격파는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고 1931년 여름 [[만보산 사건]]과 [[나카무라 사건]]을 일달아 일으킨 데에 이어 1931년 9월 18일 육군중좌 [[이시와라 간지]]의 음모로 [[류탸오후 사건]](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만주철도의 운영권을 일본 제국이 소유했으므로, 해당 폭파 책임을 중국 측에 돌려 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국 침략을 개시했다. 이곳에 배치된 중국 동북변방군(동북군, 바로 장학량의 군벌군이다)은 20만 명이 넘었지만, 관동군 불과 1만 명에게 만주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만주사변]]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제스]]가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 게 우선이니까 저항하지 말고 [[산해관]]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이런 명령 탓에 [[장쉐량]]은 이후 장제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장제스를 감금하여 국공 양당의 항일 연합을 촉구하는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는 1931년 7월과 8월, 장제스가 [[나카무라 사건]]과 [[만보산 사건]] 도중 장쉐량에게 일본군에게 도발의 빌미를 주지 말라고 내린 전보가 근거인데 말 그대로 만주사변 이전의 지시를 바탕으로 만주사변 때도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에 불과하며 한때 중국공산당측 자료에 의해 장제스 배후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으나 교차검증을 한 결과 장쉐량의 실책이 더 큰 것으로 판명되었다. 부저항 명령도 장쉐량 본인이 내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중일전쟁/오해와 편견]] 문서를 참고.] 한편 관동군측의 이런 사건 일련은 일본 중앙의 명령이 전혀 없이 벌어졌고 중앙 행정부는 사후 추인하기만 했다. 군대와 하부기관의 폭주가 국가를 막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예이다. 이렇게 만주를 차지한 일본 제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내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고, [[만주군]]을 편성하여 만주군 장교와 하사관을 일본군이 맡는 형태로 만주군을 통제했다. 관동군사령관은 만주국을 실제로 지도했고 만주국의 모든 행정은 일본인 관료나 관동군 참모가 결정했다. 어차피 [[만주국]] 자체가 일본 제국, 아니 관동군의 괴뢰국이었으므로 그 만주국의 군대인 만주군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만주군은 관동군보다 훈련 수준은 물론이고 충성심과 사기 모두 극도로 낮았기에 전력으로서는 별 가치가 없었다. 당초 만주군의 시초부터가 장쉐량에게서 강탈한 동북군 병력이었고 마적 떼나 다름없던 당시 중국 군벌군의 상태는 막장 그 자체였다. 만주군의 자세한 사항은 [[만주군]] 항목 참조. 이후 1933년 [[열하사변]], 1935년 [[하매 협정]]과 [[진토 협정]] 체결, [[기동사변]], 1936년 [[수동사변]]을 계속 일으켰다. 또한 [[중국인]]과 [[조선인]],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100 부대와 [[731 부대]]를 운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