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동군 (문단 편집) == 시초 == 일본 제국은 청일전쟁 직후 랴오둥 반도를 장악했으나 [[삼국간섭]]을 위시한 외교상 각종 압력으로 반환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 후 중국을 위협해 기어이 랴오둥 반도를 조차지로 확보하였고 이 조차지와 [[남만주철도부속지]]를 수비할 [[육군]] 관동도독부육군부(關東都督府陸軍部)를 편성했다. 이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 [[남만주철도]](만철)는 1906년 11월 26일에 설립되어 1907년 4월을 기해 남만주철도를 관동도독부에서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경비하고자 창설된 6개 독립 수비 대대가 관동군의 전신이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고바야시 히데오가 쓴 "만철:일본제국의 싱크탱크" 참고.] [[파일:external/www.willamette.edu/Kwantung%20Army.jpg]]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으로 뤼순과 다롄을 점령했고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1905년 9월 5일)하여 러시아에서 이 지역의 조차권을 인수했다. 이 지역명을 관동주[* 관동이라는 명칭이 산해관 동쪽을 의미하기에 헷갈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요동반도 일대를 러시아가 관동주라고 명명했고 일본 제국은 답습했을 뿐이다. 그 면적은 3,462 km^^2^^이고 주요 도시는 해군 기지 여순과 무역항 대련이다.]라고 정하고 [[관동총독부]]를 신설(1905년 10월 17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만주국의 모태가 된다. '관동총독부'는 이듬해 9월 1일 폐지되어 낮은 부서의 '[[관동도독부]]'가 되었지만 사실상 '총독'이 '도독'으로 바뀐 것뿐이다. 이후 1919년 4월 [[관동청]]으로 다시 변경되었는데, 이때 관동도독부육군부가 관동군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예하 병력은 6개 독립수비대대 뿐이었고, 일본 본토의 지휘를 받는 1개 사단이 2년씩 교대로 파견되어 주둔하는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