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녕 (문단 편집) === [[요동]] 시절 === 얼마 지나지 않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큰 혼란에 휩싸이자 관녕은 [[왕렬#s-2]], [[국연]], 병원 등과 같이 요동으로 피난을 갔으며, 왕렬과 병원, 관녕이 한꺼번에 자신의 [[영지(역사)|영지]]로 오니 감격한 [[공손도]]는 관역으로 달려 나가 그들을 접대할 정도였다. 관녕은 공손도를 만나 경전에 대한 말을 했을 뿐으로 세상사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아 공손도는 내심 실망한다. 하지만 관녕이 공손도를 만난 다음 영지의 북쪽의 산으로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굴을 파서 방으로 만드니 공손도는 감격하는데, 그것은 청주 사람들이 요동으로 대거 이주해 오기는 했지만, 이는 공손도가 다스리던 요동이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에 말 그대로 전란을 피해 임시로 피난할 곳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모두 [[요동반도]]의 남쪽 해안가에 거주하여 난이 진정되면 바다를 건너 고향인 청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녕이 북쪽에 자리를 잡아 고향으로 돌아갈 의향이 없음을 나타내자 유민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여 세력을 팽창시킬 야망을 지녔던 공손도에게는 반가운 행위로 난리를 피해 바다를 건넌 [[난민]]들도 대부분 관녕이 사는 곳으로 몰려왔으며, 10개월 만에 제법 큰 마을을 형성해 공손도로써는 감사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관녕은 그들을 대상으로 [[시경]]과 [[상서|서경]]을 강론하면서 조두[* 제사(祭祀) 때, 신 앞에 놓는 나무로 만든 그릇의 한 가지이다.]를 펼쳐놓고 엄숙하게 의식을 진행하고 예양을 밝혀서 가르치자 배움을 청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런 그의 현명함을 보고 공손도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백성들은 그의 덕에 감화되었다. 하지만 성품이 강직하고 사물에 이치를 연구한 것으로 높고 깨끗한 언론을 전개하기로 이름 높은 그의 친구 병원은 공손도의 [[유정(후한)|유정]]을 대하는 태도에 분노해 그를 감싸주면서 공손도를 가르치려 들자 그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느낀 관녕은 병원에게 이런 조언을 한다. >잠룡은 성덕을 보이지 않으니 시의에 적절하지 않은 말은 모두 화를 초래하게 된다네. 그 말을 들은 병원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이 점점 높아져 [[중원]]에도 알려지자 [[사공(관직)|사공]]으로 있던 [[조조]]의 귀에도 들어가자, 공손도의 [[서자]] [[공손강]]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관녕을 서쪽으로 보내라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공손강은 공손도가 죽으면 자신이 요동을 차지할 야망을 품고 바깥으로는 [[장군]][[태수]]라 부르면서 요동 안에서 왕노릇할 야망을 품고 있었으며, 그런 그의 야망에 자신을 도와주는 관녕의 존재는 필수적이었으므로 조조의 명을 발설하지 않으니 공손강의 관녕에 대한 존경심과 꺼림이 이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 중원 지역이 다소 안정되자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지만 오직 관녕만이 처음에 보여줬던 의향대로 그곳에서 평생을 지낼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런 인재를 조씨 일가는 놔두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