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현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73년생 92학번 황금세대 출신. 145km/h 빠른 공을 자랑하던 투수로 배재고와 [[영남대학교 야구부|영남대]]를 졸업했다. 영남대 시절 동기 [[전병호]] 다음가는 활약상을 보이며 95년 추계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덕분에 프로구단에 어느 정도 어필을 하는 데 성공하여 졸업을 앞둔 1995년 말 해태 타이거즈에 신인지명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김정수(1962)|김정수]] 등의 뛰어난 투수들이 많았던 해태인지라 상무에 입단하여 군 복무를 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상무는 순수 아마야구단이었기에, 프로 입단 전에 미리 병역을 해결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상무로 가서도 실업야구 감투상을 수상하는 등 활약을 펼쳐 기대치를 한껏 올려놓은 곽현희는, 전역 후 1998년 계약금 1억 원에 입단했다. 1억이라는 계약금도 계약금이지만[* 당시 경제위기로 물가가 막 상승하고 있었다지만, 해태 구단 사상 계약금 1억을 받은 건 불과 2년 전 [[장성호]]가 최초였을 정도다. 해태가 부도 상황이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있는 돈 없는 돈 다 짜내서 특급대우를 해줬다고 봐도 무방했다.], 직전 시즌 삼성으로 현금 트레이드됐던 프랜차이즈 스타 [[조계현]]의 등번호인 17번을 구단에서 곽현희에게 줬으니, 해태가 그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2년 전과 달리 곽현희가 입단하던 시점 해태의 투수진은 슬슬 맛이 가고 있던 즈음이었다. 조계현이 이적했고 김정수는 노쇠화가 오고 있었으며, 이 시점 내세울 전력이라곤 선발 [[이강철]], [[이대진]], [[김상진(1977)|김상진]]에 중무리 [[임창용]] 뿐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이 전력이 모두 사라지며[* 이강철, 이대진은 그간 굴러온 탓에 부상으로 일찌감치 시즌아웃되었으며 임창용은 삼성으로 이적, 김상진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전년도까지 아직 신인으로 계투로나 기용되던 곽현희는 졸지에 해태의 프론트라인 선발이 되었다.[* 시즌 초에는 마무리로 낙점되었지만, 이후 [[곽채진]]과 바꿔 선발로 기용되었다.] 1999년, 해태 타이거즈는 1번 [[정성훈]]으로 시작하여 [[장성호]]-[[홍현우]]-[[트레이시 샌더스]]-[[스토니 브릭스]]-[[양준혁]]-7번 [[이호준]]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화력을 자랑했다. 거기에 곽현희는 11승을 거뒀다. 그런 해태의 팀 성적은 팀 홈런 전체 1위, 그리고 정규시즌 전체 7위였으며, 10승 투수 곽현희의 평균자책점은 6.15였다. 이 해 곽현희는 최초의 6점대 10승 투수 기록을 세웠으며, KBO 역대 단일시즌 최다 피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이후 단일시즌 최다 피홈런 기록은 [[안영명]]이 경신했으며, 6점대 10승 투수 기록은 [[유희관]]이 나오며 유이한 기록이 되었다.] 이 해 해태의 투수진은 곽현희 말고도 [[유동훈]], [[오봉옥]], [[최상덕]] 정도가 있었으나 유동훈은 쌩신인이었고 최상덕은 부상에서 막 복귀한 직후였으며 오봉옥은 제일 잘 던졌다지만 전년도까지 임창용이 보여주던 그것에는 한참 밀렸다. 더불어 곽현희 포함 [[곽채진]], [[오철민]], [[박진철]], [[소소경]] 등 울며 겨자먹기로 기용한 1.5군급 신진 투수들... 덕분에 99년 해태는 막강한 타격을 앞세웠음에도 7위에 그쳤으며, 6점대 10승 투수 곽현희는 99해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선수가 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팀에 투수가 없던 사정상 선발로 자주 나왔지만, 부상 및 공이 약한 고질적인 문제 때문에 등판 빈도가 줄어들며 크게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