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영주 (문단 편집) == 여담 == * 1979년 [[10.26 사건]] 당시 추하게 화장실로 도망갔던 [[차지철]]과 달리 끝까지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은 확고해서 이승만이 하야한 후에도 변함없이 옆을 지켰다. 하지만 그 충성심은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라 전근대 시대 왕에게나 어울릴 충성이었고 이런 시대착오적인 '''우충(愚忠)'''은 이승만의 눈을 가리고 권력 남용과 국민 탄압으로 이어졌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51000209103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5-10&officeId=00020&pageNo=3&printNo=11722&publishType=00010|4.19 혁명 이후 구속된 기사]]에 의하면 곽영주는 깡패를 두둔한 적이 없고 부패도 일삼지 않았다며 끝까지 진지한 반성도 안한 것으로 보인다.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01180020910302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01-18&officeId=00020&pageNo=3&printNo=11975&publishType=00010|4.19 혁명 이후 장남(곽승근)이 유괴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범인 매석환(梅錫煥)은 [[정효주 유괴 사건#s-2|정효주 1차 유괴 사건]]의 범인이기도 하다.][* 곽승근(郭承根)은 이후 풀려났고, 1971년 [[연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치외교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했지만, 몇 년 후인 1973년 12월 심장마비로 숨졌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3121300239107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3-12-13&officeId=00023&pageNo=7&printNo=16213&publishType=00010|기사]]] * 1995년 월간조선 10월호에 최인규, 이정재, 임화수, 조용수, 최백근, 신정식, 한필국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을 때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 2010년 오마이뉴스가 곽영주의 손자 곽병민 씨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66421|인터뷰]]했는데 자기 조상의 [[흑역사]]를 어떻게든 옹호하려고 노력하는 다른 자유당 정권 인사들의 후손들과 달리 조부의 과오를 인정하면서 곽영주의 [[흑화]] 원인에 대해 아래와 같은 사견을 밝혔다. >'''할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을 충성으로 모시는 신하였다. 사실 그러한 인식이 문제였다. 지도자보다는 국가를 더 생각했어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이승만에 대한 충성 =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인식에서 역사와의 어긋남이 시작된 게 아닐까? 할아버지가 지난 역사에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이승만 대통령과 워낙 각별한 관계였기에 월권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았을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