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영주 (문단 편집) == 생애 == 1924년 1월 10일 [[경기도]] [[이천시|이천군]] 읍내면 [[율현동|율현리]](현 [[경기도]] [[이천시]] [[율현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서울과학기술대학교|경성공립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에 [[http://www.icouncil.kr/news/articleView.html?idxno=33617|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병기 병과 군조에까지 [[http://db.history.go.kr/id/im_101_30184|올랐다]]. 광복 후 경찰이 되어 구 일본총독의 관사 경비업무를 보다가, 이곳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경무대]]가 되는 바람에 곽영주도 그대로 [[101경비단|경무대경찰서]]에 근무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2년]] 드라마 '[[야인시대]]' 에서는 이천군 고향 선배인 [[이정재(조직폭력배)|이정재]]의 도움으로 경찰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드라마에만 나오는 이야기고 사실과는 다른 내용이다. 당시에는 일본군 하사관 경력만으로도 한국군에서 얼마든지 장성 또는 영관급으로 출세할 수 있었는데 굳이 경찰 말단 순경이 되기 위해 그런 청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곽영주가 수도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경찰서]]의 보초로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승만이 경찰서를 방문한 시간에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곽영주를 인상깊게 보고 마음에 들었는지 경무대 [[경호원]]으로 특채하였다는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눈에 들어 1950년 경무대경찰서의 [[경위(계급)|경위]]로 승진했으며 1951년 경무대경찰서의 [[경감(계급)|경감]]으로 승진, 1955년에는 [[행정안전부|내무부]] [[대한민국 경찰청|치안국]]의 경무과에 전보됨과 동시에 [[총경]]에 올랐다. 1956년 경무대경찰서장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 치안국으로 다시 전보되었다가 [[경무관]]에 승진하는 등 줄곧 출세가도를 달렸다. 지금의 경찰공무원 근속 [[승진]] 운영규칙과 당시 운영규칙은 판이하게 다르다. 총경에서 경무관에 오르는데는 보통 7년이 걸리지만 곽영주는 이승만의 총애를 등에 업고 경위에서 경무관까지 7년이 걸렸으니 그야말로 파격 중에서도 파격인사라고 할 수 있다. [* 다만 곽영주가 순경으로 시작해서 10여 년 만에 경무관으로 고속승진했다 라는 식으로 오늘날 근속 규정을 생각해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 곽영주는 헌병 군조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말단에서 시작하지 않았으며 경감에서 총경으로 바로 승진한 건 그 당시 경정 계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런 곽영주의 승진은 [[공무원]] 사회의 인사 원칙을 무시하는 일이었고 그 결과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대통령에게 [[아부]]해야만 출세한다는 그릇된 사고 방식을 심어주는 [[부작용]]도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곽영주는 이승만의 빽을 믿고 대통령 경호 임무를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며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한다. 이정재와 동향이고 잘 아는 사이었던 곽영주는 이정재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든 무조건 그의 편을 들어줬다. 그 결과 [[이정재(조직폭력배)|이정재]]는 경찰에 신고당해도 거의 체포당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신고한 사람이 잡혀가는 황당한 경우마저 발생하기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경호실장이 행정부에 사사건건 참견을 해대는 심각한 수준의 월권 행위를 저지른 셈으로 이 때 곽영주가 얼마나 설치고 다녔는지 '부부통령(副副統領)' 내지는 '곽박사'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였다. 재미있는건 이런 안하무인적인 월권 행태는 훗날의 유신 시절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도 충실히 계승한다. 곽영주는 군 [[장교]]의 진급 심사에도 참견했는데 나름대로는 자기 기준선에서 불온분자 소탕에 적극적이었는지 해당 장교의 소양보다는 당사자나 [[가족]]의 사상 관계를 캐묻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태클]] 걸렸던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김익렬]]과 [[박정희]]. 김익렬은 [[4.3 사건]] 당시 무분별한 경찰의 진압에 회의를 느끼고 [[빨치산]]과 일시 휴전을 맺은 탓에 공개 석상에서 면박당하고 끌려나갔으며 결국 1950년대 내내 찬밥 신세였다. 박정희는 형 [[박상희]]가 사회주의자라는게 문제가 되어 매장당할 뻔 하다가[* 그 외에도 박정희의 이혼 경력을 문제삼는 등 개인사까지 들춰냈다고 한다.] [[김정렬(1917)|김정렬]] 당시 국방부 장관과 [[백선엽]]이 도와주어 가까스로 진급되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고 해방 후 광복군 평진지대 중대장을 복무했기 때문에 창군기 국군을 구성한 3개 [[파벌]](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인맥을 모두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곽영주의 앞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그는 시민들의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민들을 무력 진압했는데 [[서대문]] 앞 총격 사건이나 [[이기붕]] 자택(현재의 4.19 도서관 터) 발포 사건은 그의 직접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자 곽영주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게 되었고 그대로 체포되어 [[장면]] 정권하에서 벌어진 재판 결과 단기형을 받았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혁명재판]]이 벌어지자 다시 체포되었는데 묘하게도 같은 혐의로 같이 체포된 [[홍진기]][* [[조봉암]]을 사형시킨 법무장관이자 [[중앙일보]]의 창업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홍석조]] BGF리테일 회장,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의 아버지이다. [[이병철]]과는 사돈이자 [[이건희]]의 장인이다.]와 유충렬[* 지금은 폐교된 [[벽성대학]]의 설립자이며 손자가 [[유정현(방송인)|유정현]] 아나운서이다.]이 사형 선고 후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것과 달리 곽영주는 그대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결국 곽영주는 [[최인규]], [[이정재(조직폭력배)|이정재]], [[임화수]], [[신정식(1928)|신정식]]과 나란히 1961년 [[교수형]]을 당했다. 당연히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과거 곽영주와 박정희의 갈등을 지적하며 곽영주가 박정희의 원한을 사서 사형을 당했다는 말도 나왔으나 사실 이걸 빼더라도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 발포 명령, [[장충단]] 집회 방해 사건 은폐 등 사형당해도 싼 사고들을 치기는 했으며, 애초에 시비를 먼저 건 것은 곽영주 쪽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