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광 (문단 편집) === 곽광의 승승장구 === 김일제는 일찍 죽어 권력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남은 보정대신은 곽광, 상관걸, 상홍양, 전천추 네 명인데 이들이 대권을 놓고 싸움을 벌일 것이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같은 보정대신이라도 권력은 곽광이 가장 높았다. 무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문제, 경제 시대의 느슨한 [[군국제]]를 깨부수고 황제 혼자 독재하는 중앙집권 관료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측근인 내조를 행정부인 외조보다 훨씬 키워놓았는데 그 내조의 수장이 곽광이었다. 상관걸은 오랫동안 한무제를 보필한 내조 사람으로 보정대신이 된 후 좌장군이 된다. 김일제 사후에는 그가 내조의 제2인자에 해당했다. 당시 곽광의 관직은 대장군 대사마로 병권을 가진 재상이었고 영상서(領尙書)[* 領은 겸임의 의미다.]로 내조의 수장까지 겸하고 있었다. 법상 필두 재상인 승상은 유명무실한 자리였다. 무제 시대에 승상이 된 자는 대부분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무제에게 사사되었다.[* 위청의 자형이자 위 황후의 형부인 공손하는 기원전 103년 승상이 되었다. 이 때 공손하는 앞서 이채, 장청적, 조주 등 승상 3명이 잇따라 삼족이 사사된 것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어 승상 자리를 고사했다. 하지만 결국 승상이 됐고 역시 가문이 주멸됐다.] 이로써 승상의 권력은 굉장히 약해져 어사대부에도 못 미쳤다. 이는 전천추 이후 승상은 곽광이 추천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 당시 승상인 전천추 역시 곽광의 측근이나 다름없었다. 외조가 약해진 한무제 시대 승상은 권력이 약했고 승상이 다시 필두 재상 대접을 받은 것은 곽광이 죽고 곽씨 가문이 타도된 이후이다. 곽광은 김일제, 상관걸과 모두 사돈관계로 그의 딸들이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과 김일제의 아들 김상과 결혼했다. 상관걸은 두 사람 사이에 낳은 딸을 황제 소제의 황후로 집어넣기 위해 곽광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곽광은 외손녀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이는 결국 두 사람이 원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사대부 상홍양은 유명한 경제관료로 벼슬도 곽광과 같은 재상급이었다. 하지만 외조에서만 활동했던 상홍양은 황제를 근거리에서 섬긴 적이 없기 때문에 애초 황제의 총애를 놓고 곽광과 싸울 처지는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8살에 제위에 오른 소제는 곽광만을 신임했다, 뒤에 나오는 모반사건 처리에서 알 수 있듯 소제는 어리석은 황제가 아니다. 보정대신 중에서도 곽광이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더 신임한 듯하다. 소제의 곽광 편애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욱 심해졌고 이 때문에 상홍양-상관걸의 입지는 더 좁아지게 된다. 그나마 상관걸이 상홍양에 붙어 1대 2의 수적 우위를 지켰으므로 이들 세력은 균형을 맞추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