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광 (문단 편집) === 새 황제의 후견인 === 무제가 죽기 4년 전인 기원전 91년, 무제는 이 때 '[[무고의 화]]'로 황태자를 죽게 만드는데 무고의 변이 혹리(酷吏: 혹독한 관리) 강충이 여태자를 제거하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무제는 매우 낙심했다. 유능한 황태자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도 문제였지만, 후계자로 생각한 아들인 창읍애왕이 죽고 남은 아들들(광릉여왕, 연날왕)은 후계자로 믿을 만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무제의 고민이었다.[* 정확히는 무제는 연날왕을 싫어했고, 광릉왕은 무능했다.] 결국 한무제는 구익부인(鉤弋夫人) 조첩여[* 일설로는 첩여가 두 주먹을 쥔 채로 태어났다는 썰이 있다. 조첩여는 커가면서도 주먹을 풀지 못했는데 어느 날 무제가 조첩여를 만나 손을 만져주니 주먹이 펴졌다고 한다. 훗날 한무제는 조첩여 소생 황자를 태자로 올리되 어머니인 첩여가 자결케 했다. 외척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라는 평가가 있는데, 위청 가문을 멸족 시킨 것도 바로 외척 전횡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평가가 있다. --여후의 추억--] 소생인 막내 아들 7살짜리 유불릉(劉弗陵)을 태자로 책봉한다. 한무제는 죽기 두 달 전 곽광에게 [[문공(주)|주공]](周公)이 [[성왕(주)|주성왕]](周成王)을 업고 제후들을 만나는 그림을 주었다.[* 주공 희단(姬旦)은 주나라 시조 주문왕(周文王) 희창(姬昌)의 차남이자 주무왕(周武王)희발(姬發)의 친동생. 무왕의 아들 성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이 됐으며 조카 대신 왕이 될 것이란 주변의 시선을 막기 위해 성왕을 업고 조정 회의에 참석했다. 형제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공이 왕위를 찬탈하려한다는 빌미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했고 성왕이 장성하자 권력을 돌려주고 은퇴했다. 한때 주성왕의 의심을 받자 도망간 적이 있었으나 이후 성왕이 병에 걸리자 '차라리 나를 아프게 하고 왕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왕실에 복귀했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사실상 첫번째 성인으로 꼽힌다.] 한무제가 병색이 완연했을 때 곽광이 누구를 후계자로 할 지 묻자 한무제는 막내를 세우고 곽광이 주공의 일을 하라고 하였다. 기원전 87년에 한무제가 죽었다. 무제가 죽기 직전 곽광은 봉거도위와 함께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라 있었다. 광록대부는 황제의 간관(諫官)인데 2품계 광록훈의 하위 관직으로 2000석 3품계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무제는 죽기전 흉노족 왕자 출신으로 곽거병에게 잡혀온 [[김일제]]와 상관걸(上官桀), 상인 출신 [[상홍양]](桑弘羊), 승상 전천추(田千秋), 그리고 곽광을 불러 불릉을 부탁했다.[* 소제기에는 김일제와 곽광만 나오지만, 곽광전에는 상관걸과 상홍양이 더해지고, 전천추전에는 상관걸과 전천추가 더해진다. 그래서 이 다섯 명을 모두 보정대신으로 본다.] 이로서 곽광을 비롯해 김일제, 상관걸, 상홍양 등은 8살에 황제에 오른 불릉의 섭정인 보정대신(輔政大臣)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