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광 (문단 편집) === 황제의 총애를 받다 === 장군이 되어 자신을 찾아온 형을 따라 장안으로 온 곽광은 10살부터 궁에 들어가 무제를 지척에서 섬겼다. 곽광은 곧장 낭(郞)[* 낭중 산하의 벼슬 이름.]에 올랐으며 이어 제조시중(諸曹侍中)[* 궁중에서 상소를 분담하는 벼슬]이 된다. 이처럼 황제 근처에서 시중을 드는 부류를 내조(內朝)라고 하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청와대 비서실이나 경호실쯤 된다. 반면 외조(外朝)는 일반 행정부를 말한다. 한나라는 건국후 개국공신 [[진평]], [[왕릉(전한)|왕릉]](王陵), [[주발]](周勃), [[관영]](灌嬰) 등이 연이어 승상이 됐고 이들 개국공신 재상들이 여후 일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자연스레 외조의 권력이 강해졌다. 하지만 한무제가 황제 직할 통치를 단행키 위해 필두 재상인 승상의 권한을 약화시키면서 대신 내조의 권세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후 곽광은 19살에 봉거도위(奉車徒尉)에 올랐다. 봉거도위란 간단히 말해 황제의 마차를 끄는 직위로서 최측근에서 황제를 보필하는 자리로 출세가 보장된 자리였다. 곽광은 이복형 곽거병이나 곽거병의 외삼촌 위청처럼 천재적인 능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격이 굉장히 괴팍한 한무제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의 행동거지 때문이었다. 반고가 지은 한서 곽광열전에서 그를 평가한 부분이 있다. >곽광은 궁궐 문을 드나든 지 어언 20여 년이나 되었지만 조심하고 삼갔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는 적이 없었다. 그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세심했기 때문에 매번 궁궐을 드나들며 수레를 내릴 때 나가고 머무르는 곳이 일정했다. 낭관(郎官)과 복야(僕射)들이 몰래 표시를 해두고 보았는데, 한 자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이와 함께 곽광은 매우 잘생겼다고 한다. 후일 선제(宣帝)가 기린각에 공신 11명의 화상을 그릴 때 곽광을 맨 앞에 그린것을 기록하면서 한서는 곽광의 용모를 자세히 묘사했는데 그는 '우윳빛 얼굴에 시원한 눈썹, 아름다운 눈매에 멋진 수염'을 가졌다고 한다.[* 키가 크지 않았다는 사료도 있지만 한서에는 7척 3촌이라 했다. 한나라 시대 1척은 24 cm이므로 곽광은 171 cm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키였을 것이다.] 곽광은 백옥같은 피부와 어릴적부터 몸에 밴 귀족으로서의 품격이 있던 인물인듯 하다. 또한 그는 공평무사한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어느날 황궁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곽광은 옥새를 지키는 것이 가장 긴급하다고 생각하고 옥새를 관장하는 상부새랑을 불러 옥새를 내놓게 했다. 상부새랑은 "옥새를 지키는 것이 신의 직책이다. 죽어도 사사로이 옥새를 넘길 수 없다."고 저항했다. 다음날 변고가 없자 그는 상부새랑의 녹봉을 올려주며 "그대가 이처럼 옥새를 지키는데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곽거병, 위청 만한 능력은 없었지만 이와 같은 인간적 매력 덕분에 곽광은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