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광 (문단 편집) === 사직을 보존한 충신 === 곽광은 어린 소제를 모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렸다. 곽광이 창읍왕을 빨리 폐위한 것은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곽(伊霍)'이라 불리며 이윤이 태갑을 내친 것과 같은 평가를 받았다. 곽광은 10살 때부터 궁에 들어가 무제의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 속관인 두연년은 한무제 시기 상홍양을 중심으로 정치 사상을 자리잡고 있던 법가를 거부했으며 두연년이 숭상했던 것은 문제, 경제 시대의 무위지치(無爲之治) 즉 황제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백성과 민간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무제 시기의 재상인 상홍양은 염철주 전매로 벌어들인 수익을 기반으로 군대를 키웠고 이 것은 한나라 시대 흉노를 토벌하고 고조선을 섬멸할 수 있었던 군사력의 뒷받침이 됐다. 처음엔 이렇게 해서 중앙의 재정수입이 크게 증가하고 국고도 충실해졌다. 무제는 전국을 시찰할 때마다 약 백만 필의 옷감과 엄청난 금전을 상으로 내렸는데, 모두 재정을 관리하는 대농에서 가져갔다. 상홍양은 또 황제의 허락을 받아 전국 각지에 속보관(粟補官)을 활용하여 곡식을 내면 죄를 감해주거나 사면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이렇게 해서 국고는 더욱 충실해져 일 년 사이에 태창·감천창이 가득 찼다. 남는 화물이나 옷감 5백만 필은 전국에 고루 나누어 운송했다. 인민들이 세금을 더 내지 않아도 천하가 풍요로웠다. 하지만 점차 백성들은 방만한 재정낭비와 흉노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전비소모, 군사적 피해로 인해 이를 보충할 필요가 있던 조정에 의해 높은 세금과 부역, 혹정에 시달려야 했고 흉노와 벌이는 전쟁을 뒷받침하던 염철주 전매는 이로 인해 국가가 백성을 곤란하게 만드는 제도로 받아들여졌다. 상홍양이 여러가지로 재정 정책안을 내놨건만 무제가 그 이상으로 말아먹고 있던 것. 또 고조 유방부터 무제의 부친인 경제까지 이르는 동안 한나라 통치 방침으로 자리잡은 군국제 대신 황제가 독재하는 군현제를 하려는게 무제의 생각이었는데 이로 인해 한무제 시대는 유교에서 기피하는 혹리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이에 반대파들은 무제시대의 정책을 전면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시대의 정책인 철과 소금의 국가전매는 본말이 뒤바뀐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일수 밖에 없었고 그 중심엔 곽광의 심복 두연년이 있었다.[* 곽광의 심복 두연년은 훗날 곽씨 일족 숙청 때 같이 제거될 뻔 했으나, 개인적으로 크게 치부한 적도 없고 비리라고 고발당한 것도 당시로는 허용범위 수준이라서 지방 좌천으로 끝났다. 워낙 유능한 인물이라 그 이후 중앙 정계로 복귀하여 천수를 누렸다.] 이런 두연년의 영향을 받은 곽광은 여민휴식(與民休息), 즉 백성에게 조세와 노역을 가볍게 하는 무위지치로 회귀했으며 무제시기의 활발한 대외정책을 포기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자유방임주의인 셈이다. 다만 이렇게 되면 귀족과 지방호족의 힘이 세졌다. 하지만 적어도 곽광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여민휴식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해 국가로 흐르던 부(富)가 백성에게도 흘렀으며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만큼 백성들의 삶도 윤택해졌다. 곽광이 찬사를 받는 이유는 바로 이 것이다. 여민휴식과 여민쟁리는 양날의 칼이다. 상홍양은 염철주 전매를 통해 얻은 부를 기반으로 국가 방위를 강화했고 이는 곽광이 통치하던 시기를 비롯해 약 100년 이상 한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무제가 통치하던 50년 동안엔 매해 빠지지 않고 엄청난 규모로 전쟁을 벌였고 군사물자의 소모가 매우 심각했으며 인적, 물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 전쟁을 치루어 결국엔 각종 세금과 증세가 이어졌다. 무제가 말년에서야 흉노전을 중단한다는 윤대의 조를 발표했을 때 백성들은 기뻐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제 시기 정책인 염철주 전매는 흉노전 전쟁을 속개한다는 의지로 보였기 때문에 당장 재산상 손실을 입는 중앙귀족이나 지방 호족이 아닌 일반 백성들도 반대했던 것이다. 한서의 저자 반고는 "곽광은 강보에 쌓인 어린 황제를 보좌하라는 황제의 유지를 받은 후 한 왕실을 보좌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며 한소제를 옹립하고 한선제를 세웠다. [[문공(주)|주공]], [[이윤(상)|아형]]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도 곽광에 대해 "곽씨 가문의 죄는 멸족되어 마땅하나 곽광의 공은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