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광 (문단 편집) === 곽씨의 몰락 === 이렇게 선제는 곽씨 사냥을 시작했다. 곽우는 자기 일족이 병권을 잃거나 지방으로 좌천되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꼈다. 곽우는 "아직 대장군(곽광)의 무덤을 덮은 흙도 다 마르지 않았는데 황제는 곽씨 집안 사람들을 멀리하시고 허씨, 사씨 집안 사람들만 가까이 하신다. 우리 집안의 모든 관직까지 다 빼앗으셨으니 죽으란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고 한탄했다. 곽현은 여기서 한 술 더 떴다. 자기 딸이 황후가 됐지만 태자는 공애황후의 아들인 [[유석]](劉奭, 훗날 [[한원제|원제]])이 올랐다. 곽현은 여기에 격분하고 유석을 암살하려 했다. 공애황후를 죽일 때처럼 음식에 독을 타려 했으나, 공애황후가 죽은 뒤 아들 관리에 몹시 신경을 쓰던 선제는 유석의 침실과 음식에 경계를 늘렸고 결국 곽현은 유석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 이 사실을 안게 된 선제는 곽씨 일족 탄압을 더욱 서둘렀다. 이젠 곽우 등도 곽현이 공애황후를 암살한 사실을 알았으며 이를 선제도 인지했음을 알았다. 다급해진 곽우는 아예 한나라 체제를 타도할 생각을 했다. 이들은 상관 태후가 선제의 외조모인 박평후를 위해 여는 연회에서 위상과 허광한을 주살하는 방법을 고려했다. 범명우와 등광한은 태후의 명이라고 공갈치고 위상과 허광한을 죽이고 곧장 황궁으로 들어가 선제를 폐위한 후 곽우를 황제에 앉힌다는 것이다.[* 곽씨가 황제가 되려고 했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아마도 당시 조정의 수사 결과가 사서에 실린 듯하다. 허나 곽우가 한 무도한 행적을 보면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현되기 전 곽산은 현토군 태수로 발령났으며 태중대부 임선은 대군 태수로 임명됐다. 이때 곽산이 궁중 기밀 문건을 누설한 죄를 짓는다. 곽현은 곽산의 죄를 사해주면 장안 서쪽에 있는 저택과 말 1천 필을 바치겠다고 선제에게 고했다. 하지만 선제는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렵 곽씨의 모반 음모도 들통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곽산, 범명우는 자살했고 곽현, 곽우, 등광한은 체포됐다. 곽우는 요참형에 처해졌으며 곽현과 그녀의 딸들. 형제 들은 모두 거리에서 목이 잘린다. 기윈전 66년에 이 사건에 연루돼 죽임을 당한 집안은 1천여 가구에 달할 정도였다. 오직 곽 황후만 겨우 살아남아 폐위된 채 소대궁에 유폐되었다.[* 이후 몰락한 가문과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여 결국 자결했다는 설이 있다.] 천하의 곽광의 가문이 멸족한 것이다. 68년 후, 원시 2년(서기 2년)이 되어 단절된 왕후들을 복권하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곽씨 일족 역시 곽광의 사촌의 증손 곽양이 박육후에 봉해져 복권되었다.[* 정말 확실하게 곽광의 자손들을 도륙내버려서 사촌의 후손을 찾아준 모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