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광 (문단 편집) === 황제를 바꾸다 === 기원전 74년 고작 21세였던 소제가 재위 14년만에 사망했다. 소제에겐 후사가 없어 다음 황제는 무제의 아들 중에 선택해야 했다. 1순위는 광릉왕 유서였고, 많은 신하가 광릉왕이 다음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광릉왕은 행실이 안 좋아 아버지 무제도 제위를 물려주지 않은 전적이 있었다. 곽광은 광릉왕이 황제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여 걱정했다. 전연년은 상나라 때 개국공신이자 재상이었던 [[이윤]](伊尹)이 사냥에 미쳐있던 [[태갑]](太甲)[* 사기에 따르면 태갑이 사냥 나갔을 때 이윤이 빈집털이해 폐위, 이후 3년 동안 동궁에 유폐시킨 후 죄를 뉘우치자 다시 복위시켰다고 한다. 다만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태갑 원년에 이윤이 태갑을 동(桐)으로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며, 7년 뒤에 동에서 몰래 빠져나온 태갑이 이윤을 죽였다고 기록됐다]을 폐했던 일을 말하며 능력 없는 자를 황제에 올리면 안된다고 하였다. 때맞춰 무릉(茂陵) 사람이 자질이 없는 사람은 황제가 돼선 안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에 곽광은 이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자신의 외손녀인 [[효소황후 상관씨]]에게 말해 두 번째 순위였던 [[폐제(전한)|창읍왕 유하]]가 제위에 오르라는 조서를 받았다. 창읍왕이 장안에 와서 즉위했는데 문란하였다. 자기가 주장해서 광릉왕을 밀어내고 창읍왕을 데려왔는데 이래버리니까 곽광은 근심했다. 이번에도 전연년이 다른 현명한 사람을 골라 옹립하라고 설득했고 곽광이 신하들을 소집했다. 곽광이 황제를 바꾸고자 한다고 말하자 신하들이 모두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연년이 칼을 빼어들고 나와 신하들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곽광에게 결단하라고 말하였다. 곽광은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말하고 즉시 신하들과 태후를 알현했다.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전연년은 우림군을 풀어 창읍왕 신병확보에 나선다. 창읍왕도 낌새를 눈치챘지만 전연년의 대처가 빨랐다. 일단 거기장군 장안세가 우림군 기병 2천 기를 거느리고 창읍왕이 창읍에서 데려온 신하 200명을 모두 구금했다. 이렇게 창읍왕의 세력을 무력화시킨 뒤 상관태후의 명으로 창읍왕을 미앙궁으로 소환했다. 창읍왕은 수하가 모두 체포되고 홀로 남은 상태라 미앙궁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상서령이 읽은 폐위 사유는 일부는 다음과 같다. 상복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 시종관에게 여자를 강제로 끌고오게 하여 숙소로 들였다, 닭과 돼지고기를 사먹었다, 복상하는 곳에서 국새를 열어놓고 봉하지 않았다.[* 매우 불경한 행동이다.] 창읍국에서 시종, 마부, 노비 200명을 데려와 궁궐 안에서 장난치며 놀았다, 누구에게 황금 천근을 주어 아내 10명을 얻도록 명했다, 상중인데 창읍의 악인을 불러들여 악기를 연주하고 잡기를 연기하게 하였다, 장례를 마지고 돌아오자마자 상림원의 연못으로 가서 악기를 연주하고 가무했다, 제사 준비하는 음식을 가져오게 해서 먹었다, 멧돼지와 호랑이 싸움을 즐겼다, 황태후의 작은 가마에 관노를 태우고 놀았다, 소제의 궁인 몽과 음란한 행동을 하고 액정령에게 발설하면 허리를 잘라 죽이겠다고 하였다. 이하 생략. 상관태후 앞에 선 창읍왕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폐위를 인정했고 그날로 창읍으로 돌아갔다. 27일 천하의 끝이었다.[* 전연년은 창읍왕을 당시로선 오지인 한중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지만 곽광은 그냥 창읍으로 돌려보낸다. 창읍현은 한 고조 유방이 항우와 함께 진(秦)나라를 토벌할 때 가장 먼저 평정한 곳이며 창읍국의 수도로, 창읍국은 원래 산양군(山陽郡)이었으며 창읍애왕이 봉해지면서 창읍국으로 바뀌었지만 이 사건 이후 도로 산양으로 바뀐다. 그리고 한나라 마지막 황제 헌제가 폐위된 후 쫓겨나는 곳이기도 하다. 또 창읍왕은 창읍으로 돌아갔지만 분봉왕의 지위를 잃었다. 그가 다시 복권되는 것은 곽광이 죽고 황제 선제가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을 때다. 하지만 선제도 그를 위협으로 여겨 왕 대신 후의 작위를 주었고 봉읍도 창읍에서 멀리 떨어진 해혼으로 전봉시켰다. 그 후에도 선제는 해혼후가 된 창읍왕을 계속 감시하다가 트집을 잡아 봉읍의 3/4를 몰수했고 해혼후는 화병으로 죽었다.] 창읍왕의 신하 200명은 보필을 잘못하여 왕을 악에 빠뜨렸다는 죄목으로 모두 사형당하였다. 사형받으러 끌려갈 때 큰 소리로 울며 "마땅히 처단해야할 사람을 처단하지 못해서 도리어 우리가 죽는다."라고 하였다. 곽광이 선택한 다음 황제는 비운의 황태자 유거의 손자 유병이(劉病已)이다.[* 무고의 화 당시 유병이는 갓난 아기였는데 할아버지 태자와 증조모(위황후), 아버지 유진이 죽자 어머니 왕씨도 자살한다. 유병이는 감옥에 들어가는데 정위감 병길(丙吉)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病已라는 이름은 어릴 때 자주 아팠기 때문에 병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로 지어졌다. 곽거병의 去病도 같은 의미다. 두 여죄수의 젖동냥으로 목숨을 이어온 유병이는 곧 할아버지 유거의 무고함이 밝혀지자 풀려났다. 유병이는 병길의 추천으로 곽광의 낙점을 받았고. 그 뒤 양무후(陽武侯)에 책봉됐다. 평민신분으로는 황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황제에 등극한다. 병길은 곽광과 가까웠던 장안세의 동생과 친했다. 병길이 유병이를 추천하자 장안세를 통해 곽광에게 올라갔다.] 유병이는 억울하게 죽은 여태자 유거의 손자이므로 정통성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유병이는 17살 때까지 평민 신분으로 살았기 때문에 지지세력이 없었다. 외척은 있었다. 유병이는 황제가 되기 전 허광한의 딸([[공애황후 허씨]])과 결혼했다. 하지만 장인 허광한[* 허광한은 창읍왕의 가신으로 낭(郎)에 있었는데 무제의 사냥길에 따라 갔다가 다른 낭의 안장을 자기 말에 얹은 적이 있었다. 이 일로 그는 '간 크게 황제 행차 때 도둑질을 한 놈'이 됐고 궁형을 받아 내시가 된다.]도 신분이 미미해 외척 세력으로 득세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병이는 황제가 된 후 공애황후를 데려오는데[* 선제는 "짐은 옛날에 쓰던 칼을 다시 쓰고 싶다"며 공애황후를 불러들인다.] 곽광이 이를 승인한 이유도 자신에게 적이 될 외척 세력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중에 이 허씨 일가가 외척질을 하지만. 유병이는 기원전 74년 전한의 제9대 황제 [[선제(전한)|선제]](宣帝)로 등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