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광 (문단 편집) === 권력싸움의 시작 === 불안해진 상홍양, 상관걸은 곽광을 칠 궁리를 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앞장 선 자는 황후의 할아버지 상관걸이다. 두 사람은 궁중 내부의 조력자가 필요했는데 여기서 발탁된 사람은 상관걸과는 친하고 곽광과는 원수인 개장공주(蓋長公主)[* 개장공주는 소제의 이복 누나이자 당초 황태자로 거론됐던 연날왕 단(旦)의 누나. '개'를 개장공주의 남편의 칭호로 볼 수도 있고 어머니의 성으로 볼 수도 있어서 연날왕 단의 이복 누나일 수도 있으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필 '단의 누나'라고 기록된 까닭은 그가 단의 동복 누나라서 그렇다고 추측하기도 한다.]였다. 개장공주는 앞서 기원전 83년 상관걸의 친손녀이자 곽광의 외손녀를 소제의 황후로 올리는데 앞장섰다. 상관걸은 자신의 친손녀를 황후로 올리려고 눈에 불을 켰지만 곽광이 반대했다. 당시 상관걸의 친손녀는 3살로 너무 어리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속마음은 상관씨를 외척으로 올리지 않겠다는 것이었겠지만. 아무튼 곽광이 반대하자 상관걸과 상관안은 개장공주의 애인 정외인(丁外人)을 포섭해 개장공주를 끌어들였고 개장공주가 적극 나선 데 따라 상관걸의 친손녀는 일단 후궁인 첩여(婕妤)로 들어갔다가 황후로 간택됐다. 황후 책봉 이후 개장공주는 자신의 정인인 정외인에게 후작을 줄 것을 곽광에게 부탁했는데 곽광은 공이 없는 사람에게 봉작을 줄 수 없다며 한큐에 거절한다. 이에 개장공주는 광록훈 벼슬이라도 달라고 요청했지만 곽광은 이마저도 들어주지 않았다.[* 평민인 정외인이 개장공주와 결혼하려면 벼슬이나 봉작은 필수적으로 있어야 했다.] 비슷한 시기 상홍양도 자기 아들에게 관직을 줄 것을 요구했지만 곽광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이제 상관걸 일당에게 곽광은 권력 싸움의 대척점일 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수가 돼버렸다. 이들은 황제가 되지 못해 곽광을 원망하던 연날왕 유단(燕剌王 劉旦)[* 연왕 유단은 무제와 그의 후궁 이희(李姬)의 아들로 광릉여왕 유서의 동복형이다. 무제 생전 여태자와 제왕이 죽자 계승순위상 자기가 다음을 이어야한다고 주장하다 무제의 분노를 샀다. 소제 즉위 후 곽광이 돈 3천만 전을 주고 1만 3천 호를 증봉했으나 이에 만족치 않고 황제가 되려했다. 유단은 이후 속하 성진(成軫)의 계략에 따라 소제가 무제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내고 소제를 타도하려 했고, 역모가 들통나 가담자들은 주살됐으나 유단 본인만은 무사했다. 그러나 유단은 여전히 제위에 야심을 둔 채 상관걸을 왕으로 삼기로 하고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개장공주의 사인 연창(燕倉)이 고발해 들통났다. 소제와 곽광은 우선 도성에 있는 상관걸, 상홍양 등은 잡아 죽인 후 사면령을 내려 유단을 안심시켰지만 곧이어 소제는 유단을 꾸짖는 새서를 내렸다. 이를 본 유단은 결국 목을 매 자결했다. 연왕의 왕후와 첩 20여명도 함께 유단을 따라 자살했다. 이후 소제는 유단의 세자 건을 사면하고 유단의 시호를 날(剌)로 정해줬다. 훗날 선제는 유건을 광양왕으로 봉했다.]도 끌어들였다. 이들은 염철회의가 있던 기원전 81년에 움직였다. 곽광이 황제 친위대인 우림군(羽林軍)을 검열하고 그 과정에서 교위를 하나 불러 새로운 직위를 준 것을 역모로 둔갑시킨 것. 워낙 황제의 총애를 받는 곽광이었기에 상관걸 등은 곽광 모반 상소를 감히 스스로 올리지 못하고 황제의 이복 형인 연날왕에게 올리도록했다. 그리고 상소를 올린 것도 곽광이 휴가로 자리를 비운 날을 선택했다.[* 모든 정무를 맡았던 곽광이 휴가를 갈 땐 상관걸이 대신 정무를 맡았다.] 연왕 단 이름으로 올린 상소에서는 곽광이 우림군을 사열할 때 황제가 직접 사열할 때처럼 길을 막고 통행을 금지시켰고,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고 멋대로 교위에게 새로운 벼슬을 준 것은 황제의 권한을 침해한 것으로 모반의 징후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소제는 이 상소문을 가만히 두고 우선 곽광을 찾았다. 상관걸 등은 "곽광이 죄를 두려워해 편전에 머물고 있다." 하고 말했다. 실제 곽광은 자신에 대한 모반 상소가 올랐다는 말을 듣고 금란전(金鑾殿: 황제가 조회를 보는 궁궐)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편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소제가 곽광을 부르자 곽광은 우선 관을 벗고 자신의 죄를 고했다. 그러나 소제는 곽광에게 먼저 관을 다시 쓰도록 한 후 그가 우림군을 사열한 것이나 교위 직위를 내린 것은 모두 최근 열흘 안의 일이며 장안 주변에서 벌어진 일인 것을 감안할 때 장안과 10만 리나 떨어진 연경(현 베이징)에 있는 연날왕이 알고 상소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곽광이 모반을 하려 했으면 그냥 했지 교위를 더 뽑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14살인 소제의 판단에 신하들이 놀랐다. 소제는 상소문을 올린 경위를 파악했고, 거짓 상소문을 올린 일당은 도주했다. 그 이후에도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은 끊임없이 곽광을 참소했다. 하지만 소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럼에도 참소가 계속되자 불같이 화를 냈다. 소제는 "곽광은 내 어버이 같은 신하이므로 그를 참소함은 용서치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상관걸 일당은 소제가 있는 한 곽광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이 짜낸 계략은 곽광을 죽인 후 소제를 폐위시키고 연날왕을 황제로 올린다는 것이다. 기원전 80년 상관걸 등은 개장공주 집에서 연회를 연 뒤 곽광을 초대하고 미리 배치한 자객들로 하여금 곽광을 죽인다는 작전을 세웠다. 곽광만 죽이면 소제 폐위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 소제(昭帝)가 소제(少帝)[* 한나라때 정통성이 없거나 강제 폐위된 황제를 일컫는 칭호다.]가 될 뻔한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야심찬 작전은 내부 고발자로 인해 두연년에게 딱 걸린다. 대노한 소제는 승상 전천추에게 명해 곽광 암살을 기도한 무리를 모두 잡아들이고 삼족을 멸하도록 했다. 이로써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 삼상은 모두 처형당해 기시[* 죽은 뒤 시체를 저자거리에 버려두는 것.]됐고 황제의 이복 형제인 연날왕과 개장공주는 각각 자결했으며 연나라는 폐지됐다.[* 선제가 기원전 73년에 즉위하면서 연날왕의 아들 유건이 복권돼 광양왕이 된다.] 상관·상씨 집안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곽광의 외손녀인 효소황후뿐이었다.[* 효소황후는 이후 창읍왕, 선제를 지나 원제 재위 말기에야 세상을 떠난다. 얄궂게도 상관씨의 마지막 핏줄이 곽씨보다 오래 살아남은 것.] 이로써 대장군 곽광은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상홍양이 그토록 애썼던 염철주 전매는 모두 폐지되었다. 물론 곽광이 아니라 두연년이 했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