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화당(미국) (문단 편집) ==== 남부 전략과 신보수주의의 태동 ==== 공화당과 민주당의 남부보수파들이 협력한 보수연합은 공화당과 남부 사이의 오랜 원한을 희석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20세기 들어와서도 남부에서 공화당의 입지는 거의 없었다. 공화당이 남북전쟁 이후 남부를 방치한 것도 있지만, 남북전쟁 자체가 노예제라는 한 제도를 넘어 노예제를 포함한 여러 문제, 즉 농업과 산업의 대립, 남부의 현금작물 대농장과 북부 개척민(자영농)들의 대립 등 다양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기에, 아예 출신 성분 자체가 달랐던 공화당은 남부와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딜정책에 맞서 보수연합을 구축한 경험은 공화당과 남부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공화당 자체적으로도 [[아일랜드계 미국인|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미국인|이탈리아계]], 동유럽계와 같은 이민자들과 남부 시골에서 상경한 흑인들의 비율이 북부 대도시들에서 꾸준히 증가해 이들 지역에서의 민주당 지지세가 강해지고 있다는 부분을 인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북부 도시들을 대체할 지역적 기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보수 연합을 통한 남부와의 새로 생긴 접점과 북부의 인구 구성 변동은 공화당으로 하여금 민주당의 텃밭인 남부를 공략하는 전술, 일명 '''남부 전략(Southern Strategy)'''을 추진할 기반과 동기가 되었다. 민주당의 남부보수파들 또한 루스벨트와 트루먼 시절에는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있어도 민주당에 몸은 담고 있었지만, 1960년대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이 민권 운동을 강력히 지지하면서 민주당의 새로운 주류가 된 진보주의자들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보수 연합의 핵심 인물이기도 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 스트롬 서먼드가 감지하였고, 그는 주권 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남부 백인들의 마음을 돌려 민주당을 분열시키려 했다.[* 케네디의 경우엔 대선에서 남부 선거인단 15명이 제3의 인물을 지지하는 돌발 사태까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서먼드의 표였다.] 그리고 이 상황을 포착한 공화당의 닉슨은 당시 일고 있던 민권 운동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이 딕시크랫들을 유혹했고, 기어이 1964년 서먼드가 공화당에 입당하면서 남부의 정치 토양은 대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196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애리조나]]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였다. 그래도 결국 선거 결과는 존슨의 대승으로 끝나나, 민주당 대승 속에서도 당시 '''공화당을 지지한 것은 기어이(그리고 도리어) 남부'''였다. 존슨의 지지 기반이었던 [[텍사스]]를 비롯하여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주]] 등은 존슨을 찍어 주었으나 Deep South로 분류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앨라배마]], [[조지아 주|조지아]], [[미시시피]], [[루이지애나]]는 골드워터의 손을 들어 주었다. 참고로 50개주+DC 중에서 골드워터가 승리한 주는 전술한 Deep South 5개주+골드워터의 Home State인 애리조나가 전부. 상황이 정반대가 된 것이다.[* 참고로 골드워터가 출마한 이때를 미국 20세기 [[보수주의]]의 시작으로 본다. 골드워터가 처음 나왔을 때는 '자유의지주의'와 '신보수주의'가 생소한 개념이었으나, 이후 미국에서 신보수주의의 싹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골드워터는 [[낙태]]를 반대하지 않는 등 그야말로 자유주의자라서 훗날의 미국 공화당 정서와는 조금 안 맞는 인물이긴 하지만... 재밌게도 이 계통을 [[존 매케인]]이 이어받았다. 이후 공화당은 닉슨을 내세워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고, 이때부터 남부가 압도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기 시작한다는 말이 있으나, 낭설이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남부 출신인 [[지미 카터]]의 첫번째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고는 남부가 공화당을 지지하지만,[* 카터는 [[버지니아 주]]를 제외한 모든 남부 주에서 승리했다.] 그 외의 선거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닉슨과 골드워터의 뒤를 이은 레이건이 문화적 보수주의 전략을 밀어붙이고도 90년대는 되어야 남부의 표심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남부에 잔존한 친 민주당 정서, 남부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절대적 지지, 지방 의회와 주 정부,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게 더 이익이 될 것이라 판단한 남부인들의 표심이 작용한 것이었다. 60 ~ 70년대에 압도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다는 미국 남부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가 상원 의원을 3선이나 역임하고 그 아들까지 상원 의원을 지냈으며, 윌리엄 풀브라이트는 아칸소에서 74년까지 상원 의원을 해먹었다. 이는 무수히 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80년대까지도 남부 주의 지방 선거, 상 · 하 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계속해서 우세를 점했다. 'Solid South'는 굳건했던 것이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시대는 [[워터게이트]] 이후 암흑기로 떨어질 뻔한 공화당이 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레이건은 [[신보수주의]] 노선을 들고 나오며[* 신자유주의라고 표현도 하지만, 사실 이론적으로만 따지면 경제적 자유주의 외엔 문화적 보수주의를 내세운 신보수주의와 딱 맞는 말은 아니다.] [[소련]]과 협상을 시작, 소련을 개방의 길로 이끌려했으나 지지부진한 협상 속에 어쩌다보니 소련 스스로 국가가 붕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물론 이는 당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의지도 있기는 했다. 레이건 지지자들은 소련과의 군비 경쟁이 결국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소련을 경제적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어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노선을 이끌어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고르바초프의 온건 노선 자체가 [[유리 안드로포프]]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물론 군비 경쟁에서 나자빠진 것이 급진적인 정책에 영향을 끼친 건 있겠지만. --그냥 군비경쟁 안했으면 됐지 않나--] 일명 "고르바초프 서기장, 이 장벽을 허무시오!"가 실현된 것. 이런 분위기 속에 치러진 레이건과 [[월터 먼데일]]의 1984년 미 대선은 보나마나한 승부였다. 먼데일은 미국 50개 주+DC 가운데 자신의 고향인 [[미네소타]]와 DC만 간신히 먹고 나머지는 모두 레이건에게 내주는 대패를 당한다. 득표율은 58.8 : 40.6%. 당시 레이건의 인기도 인기지만, 먼데일이 좀 멍때리는 인상이라서(...) 이런 극단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이 선거에서 민주당 제럴딘 페라로가 미국 대선 사상 최초의 거대양당 여성 부통령 후보로 나오긴 했다.] 그러나 집권 2기 들어 경상수지, 재정적자와 더불어 주가가 폭락하는 [[블랙 먼데이]] 사건이 터지는 등 레이거노믹스의 약빨이 떨어지고, 하원과 상원 선거의 잇따른 패배와 함께 [[이란 콘트라 사건]]까지 터지면서 공화당의 지지율도 떨어져 1988년 대선에선 공화당 재집권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 부시-- 조지 H. W. 부시가 짠 선거전략이 꽤 효과를 발휘하면서 선거 결과는 생각외로 제법 여유있게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다. [[조지 H. W. 부시]] 임기 때는 [[냉전]] 뒷수습은 잘했지만, [[걸프전]]의 함정과 경기 침체로 인해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를 내세운 민주당의 젊은 [[빌 클린턴|아칸소 주지사]]에게 백악관을 내주며 재선에 실패하고 만다. 그래도 전화위복이라고 클린턴 정권이 의료개혁의 실패로 비틀거리자, 1994년 중간선거에서 하원 지도자 뉴트 깅그리치가 내세운 '미국과의 약속(계약)'으로 공화당이 40년만에 하원 다수당 자리를 되찾는 쾌거를 맛보기도 했다. --올레-- 정권을 되찾았지만 의회 권력을 몇십년만에 빼앗긴 민주당으로서는 상당한 충격이었으며, 덕분에 클린턴 정권은 임기 내내 공화당이 주도하는 하원에 끌려다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