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화당(미국) (문단 편집) === 19세기 === [include(틀:미국 정당의 역사)] 19세기 중반 미국 정치권에서 노예제도가 주요 정치적 현안으로 대두되자, 이에 대해 어정쩡한 입장을 취한 당시 휘그당 지도부 때문에 노예제 찬성파와 반대파의 갈등이 극심해지자 결국 휘그당이 깨지는 사태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결과 1854년 휘그당의 진보적 탈당파인 공화당 급진파들을 중심으로 지금의 '''공화당이 창당'''된다. 1861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처음으로 집권에 성공한다. 당시 공화당 내에는 링컨처럼 연방 보존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온건파부터 시작해서 남부 노예 즉각 해방에 무상 토지 분배까지 주장하는 급진 개혁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계파가 있었는데, 이들을 아우르는 노선 두 가지는 '''연방의 권한 강화'''와 노예제 확산 반대, 장기적/궁극적으로는 '''노예제 폐지'''였다. 사족으로 당시 공화당이 이런 인권 노선을 내세운 배경엔 여러 설들이 있는데, 과거엔 경제적 요인이 컸고 심지어 [[남북전쟁]]의 원인은 순전히 경제적 요인 때문이었다는 비정한 주장이 정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공업화에 성공한 북부와 농촌 시골이라 노예 일손이 필요했던 남부의 갈등이 부각되는 식. 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경제적 요인만으로 남북전쟁을 설명하기보다는, 도덕적 이슈가 정치의 메인이 될 만큼 성숙한 당시 미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적 변화를 주목하는 것이 부각되고 있다. 단순히 경제적 문제만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 [[남북전쟁]] 항목도 참조. 하여튼 그렇게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고 링컨이 암살당한 이후, 19세기 중후반 공화당은 반대로 장기집권을 이룩한다. 어찌보면 당연한게 남북전쟁에서 남부연맹을 지지했던 전력이 있던 민주당은 '''반역당'''이 되었으니 북부의 군정에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부 백인들은 연방에 충성 서약을 하기 전까진 한동안 참정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일명 재건 시대(1865~1877) 동안 공화당 내 급진 세력인 [[공화당 급진파]]가 세력을 키워 집권에 성공하는데, 이들은 공화당 급진파를 반대하는 [[앤드루 존슨]] 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하기도 하고[* 민주당&남부 출신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링컨이 통합을 강조하며 스카웃한 인물로 양쪽에서 눈칫밥을 먹었는데, 링컨 사후 공화당 온건파들을 설득해 남부연맹을 지지한 민주당 인물들을 중용하려 했기에 급진파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공화당 급진파 소속 인물인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대통령이 되면서 급진보적인 정책들을 펼쳐나간다. 이때 통과된 법이 [[미국 헌법]] 수정헌법 제13조[* 링컨 때 통과되었지만 이 법을 본격적으로 인용한 건 재건 시기부터다.], 제14조, 제15조 등. 1875년엔 시민권법을 통과하고 흑인 남성에게 투표권과 함께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자격도 부여했다. 재건 시대 당시 흑인 상원 의원들이 남부에서 많이 취임한 건 공화당 급진파의 공이 큰 것. 이런 정책들을 순탄하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건 이 당시 공화당의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인데, 1866년과 1868년 미국 상원의 공화:민주 의석 비율은 무려 57:9, 62:12이었고, 하원은 174:48, 168:70으로 공화당이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872년에도 하원 203:89라는 기록을 세웠다. 다만 이후부터 공화당은 하락세를 타기 시작해 하원은 1874년부터 1894년까지 20년간 두 번(80년, 88년)을 제외하고는 소수당이 되었는데[* 상원은 그래도 사정이 나아 1878, 1880, 1892년 선거를 빼면 다수당 지위를 유지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장기집권이 계속되며 당시 대중들의 피로도가 쌓였고 이걸 당시 정권이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절 대통령들 중 ([[앤드루 존슨]]을 빼면) 사실상 유일한 민주당 당적 대통령이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클리블랜드]]가 상당수 학자들에겐 가장 고평가 받을 정도로 이시기 공화당 대통령들은 업적과 별개로 개인적 측면에선 크게 부각받진 못했다.[* 그래서인지 율리시스 그랜트 이후 이시기 공화당 대통령들은 죄다 재선은 못하고 초선만 한다.] 첫 패배는 북부군 지휘관 출신 [[율리시스 S. 그랜트|그랜트]] 정권의 말년이었는데, [[디버프#s-1]]와 함께 일시적 경제 공황이 닥치자 민주당은 여전히 지지 기반 측면에선 열세긴 했으나[* 인구적인 측면에서 당시 서부를 개발한 북부의 인구는 압도적이었다. 민주당이 중서부 농업주들의 지지를 받을 때도 공화당 지지자들의 인구가 더 많아 호재로 작용했다.] 그래도 공화당 인기가 낮아져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인기 등을 바탕으로 하원 과반을 이뤄낸다. 물론 클리블랜드가 대통령이 된 1894년 이후로는 다시 일시적 공황에 공화당이 다시 하원 다수당을 차지하면서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2기 행정부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근데 사실 흑인 인권 측면에선 이 시기 공화당의 부침이 좀 아쉬운 게, 하원 패배와 함께 대선에서도 득표율 격차가 줄어들며 심지어 전체 득표율에선 공화당이 뒤지는 경우도 나오자[* 애초에 남북전쟁 이후에도 의외로 대선 득표에선 민주당이 폭망까진 아니라 40%대 득표율을 이어오다 1876년 대선에선 민주당 [[새뮤얼 틸던]]이 전체 득표에선 이겼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 '''1표차'''로 져 낙선하기도 했다. (이때의 여파로 1877년 남부 군정도 종료된다.) 자세한건 새뮤얼 틸던과 [[러더퍼드 B. 헤이스]] 항목 참조. 사실 민주당이 선거인단 투표라는 미국의 투표 제도에 상당히 손해를 많이 본 정당이긴 하다. 당장 1888년 대선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 공화당 내부에선 우리가 너무 노예제 문제에만 치중했나 하는 자성론이 나오게 되었고, 이후 경제 문제 등에 집중하게 되면서 연방군이 철수하고 '''남부는 사실상 방치된다.''' 그리고 덕분에 남부는 말로는 노예 해방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심각한 [[인종차별]]이 남아있는 상태가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등이 주도한 [[미국 흑인 민권 운동|흑인 민권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100여년 가까이 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도 친연방을 표방하던 공화당 정권 아래 연방정부의 힘은 상대적으로 세졌는데, 이는 지금도 미국 연방정부의 권력이 다른 나라 중앙정부에 비해 약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필요한 조치였다. 초창기의 연방정부는 '''세금을 부과할 권리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미국에서 소득세를 부과하게 된 것은 헌법을 수정하고 나서인 1895년이다. 물론 이것 역시 [[사회주의]]라고 매도하는 수많은 반발을 뚫고 이룩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