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처가 (문단 편집) ==== 사망 ==== 사망 순으로 나열. * [[이스라엘]] [[아합]] - 중동의 뉴욕이라 불리는 티로와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았다. 이세벨의 고향의 신앙을 퍼트렸고 기존의 예언자세력들이 반발해 구약사상 가장 강렬한 종교내전이 일어났다.[* 추정상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때 무려 바알 등 이방신 선지자만 850명이 죽었는데 당시 정황상 엘리야와 그들만이 있었을 리는 없고 아합 왕과 이제벨 그리고 백성들까지 있었을테니 죽은 사람이 선지자만 850명이고 그 외에 이방신 추종자들도 여럿 죽어나갔을 것이다. 물론 이들 모두 야훼 추종자들에게 죽었을 것이다.] 아내에게 모든 걸 의지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종교 문제에 한해서 그랬고 나머지까지 이세벨에게 의지하지는 않았다. 다만 워낙 시돈이 강성했다보니 아내 앞에서 깨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원 간섭기 고려의 왕들도 나름대로 자기 나라에서는 자기가 알아서 다스릴 수 있었지만 결코 아내인 원나라 공주들 앞에서는 깨갱하는게 답이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아내에만 의존하고 사는 나약한 왕이었다면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시리아에서 승리를 거두어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출을 1세기나 늦춘''' 그런 업적을 남길 순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아합이 공처가인건 맞았기에 신학자들은 아합이 바알 신앙(이세벨의 고향 시돈에서는 바알을 숭배했다.)을 퍼뜨린 것은 아내 눈치를 본 것이라고 보았으며 오히려 아합은 선지자들과 야훼 신앙을 두려워해 이세벨은 마냥 그들을 무시했다면 아합은 들어줄 때는 들어주고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했을 때도 엘리야가 엄히 꾸중하자 싹싹 빌어 그나마 자기 대에는 집안이 망하지 않게 되었고 종교탄압도 본인이 아니라 이세벨이 다 했다. 오히려 아합은 야훼를 믿건 바알을 믿건 믿을 사람은 믿고 안 믿을 사람안 믿지 말라는 방치형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나봇의 포도원이 그 예. 그 결과 그의 집안이 모두 멸망했다. 성경대로라면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공처가다. * [[그리스]] [[소크라테스]][* 실상은 왜곡, 과장된 면이 강하다고 전한다.] * [[중국]] [[사마의]] - [[장춘화]] *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 - '''[[테오도라(6세기)|테오도라]]''' * [[동로마 제국]] [[벨리사리우스]][* 위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부인 테오도라와 벨리사리우스의 아내 안토니나는 친구다.] * [[중국]] [[수문제]] - [[독고가라|문헌황후]][* 혼인 전, 양견에게 자신 이외에 후궁을 들이지 말것을 서문화하지 않으면 혼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 [[중국]] [[수나라]]의 [[두건덕]] - 수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수양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만큼 용감한 도적 두목이었으나, 정실 부인인 조씨의 질투가 워낙 심해서 힘들게 잡은 포로인 소황후[* [[수양제]]의 정실 부인으로 수양제가 우문화급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 우문화급이 납치하여 강제로 부인으로 삼고 있었다가 두건덕이 군대를 이끌고 우문화급과 싸워 그를 죽이고 나서 소황후를 빼앗아 첩으로 삼았다.]를 애첩으로 삼았으나, 조씨가 남편이 소황후와 가까이 있는 모습을 보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제대로 [[불륜]]을 즐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돌궐]]의 [[힐리가한]]한테 보내버렸다.[[https://m.blog.daum.net/shanghaicrab/16154113|#]][* 엄밀히 말하면 힐리가한한테 시집을 가있던 수나라의 의성공주(義成公主)가 시누이인 소황후를 불쌍히 여겨 두건덕한테 사신을 보내어 자신한테 보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두건덕은 돌궐을 상국으로 섬기고 있던 터라, 돌궐의 황후가 된 의성공주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실제로 수말당초 무렵, 돌궐은 무려 100만 대군을 거느리고 중원을 압박하는 [[초강대국]]이었고, 그런 만큼 두건덕을 포함하여 수많은 중국의 도적 두목이나 군벌들은 돌궐을 섬기며 그들의 힘을 빌려 중국의 황제가 되려고 했으며, 그들이 돌궐한테 보내는 사신들이 워낙 많아서 길에서 서로 마주칠 정도였다고.] * [[중국]] [[당고종]] - '''[[측천무후]]''' * [[중국]] [[당중종]] - '''[[위황후]]''' * [[중국]] [[송광종]] - '''이황후'''(이봉랑) * [[고려]] [[충렬왕]] - '''[[제국대장공주]]''': [[제국대장공주]]가 [[쿠빌라이 칸]]의 딸이었기 때문에,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과 달리 그녀를 크게 거스르지 못했다. 하지만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잠잠해졌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시대 대신들도 공처가가 많았는지 [[충렬왕]] 때 박유라는 신하가 "지나치게 감소한 남성의 성비를 맞추기 위해 남자가 두 부인을 둘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찬성을 전혀 얻지 못했고'''[* [[고려사]]에서는 직접 "재상들 가운데 아내를 무서워하는 이가 있어서"라고 표현한다.] 심지어 한 노파에게는 "저게 바로 마누라 둘 두자고 한 빌어먹을 늙은이"라고 손가락질까지 당했다고 한다. 바로 고려사에 수록되어 두고두고 회자된 그 이야기다. 연등회에 참석했다가 같이 참석한 대신 부인들이 "저놈이 마누라 둘 두자고 제안한 놈이다"라고 외치며 손가락질에 돌팔매까지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조선]] [[최항(조선)|최항]] * [[조선]] [[이원수(조선)|이원수]] - '''[[신사임당]]''' : 별볼일 없던 남편과는 달리 아내는 현대로 치면 잘 나가는 예술가 겸 아마추어 학자였으며 사임당 본인의 친정도 매우 좋았기에 처갓집과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다. 그녀가 죽은 이후엔 그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첩을 집에 들였다. 다만 아내인 신사임당과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이가 나빴다면 자식을 7명(4남 3녀)이나 둘리도 없다. 애초에 신사임당이 싸울 정도로 일을 몰고 갈 사람이 아닌데다가, 이원수 본인도 뛰어난 아내에 대한 질투나 열등감을 속으로 삭힐지언정, 신사임당에게 드러내놓고 분풀이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럴 처지조차 아니었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이후 사임당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억지로 들인 새어머니 권씨와 사이가 나빴다.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3남인 [[율곡 이이]]는 이후로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으며, 어머니면 몰라도 아버지에 대한 회상도 한 적이 없다. 아무래도 이이는 아버지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 때문인지 그를 종사로 추종했던 당파인 [[서인]]들도 '아! 사임당 신씨는 얼마나 현숙한 여성이셨던가! 과연 성인을 낳으실 만하다'라고 찬양했을지언정 그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 [[중국]] [[명나라]] [[척계광]] * [[일본]] [[후쿠시마 마사노리]] : [[센고쿠 시대]] 일본의 유력 다이묘 중 하나였다. 바람 피우다 걸려서 아내가 [[나기나타]]를 휘두르며 쫓아오자 도망쳤다는 일화가 있다. * [[일본]] [[도쿠가와 히데타다]] * [[조선]] [[현종(조선)|현종]] - '''[[명성왕후]]'''[* [[고종황제]]의 아내 [[명성황후]]와는 다른 인물. 애당초 이쪽은 [[여흥 민씨]]이다.] 김씨(본관은 청풍) : 괄괄한 아내 때문에 [[후궁]]을 들이지 못했다고 하며, 이는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후궁을 들이지 않은 국왕'''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다만 현종의 경우도 정종과 더불어 '애처가'의 일면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다. 현종 사후에는 [[숙종(조선)|숙종]]의 괄괄한 어머니[* 다만 이 구절만 읽고 숙종이 모후에게 쩔쩔매던 유약한 군주였다고 보는 것은 완벽한 오해다. 실제로 숙종은 그 명성왕후조차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나조차 감당할 수가 없다."라고 할 정도로 '''모후를 능가하는 심각한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다.''' 애초에 숙종은 고작 14세에 친정을 시작할 정도로 정치력이 뛰어나고 자기 주장이 확실한 왕이었다.]로 진화하여 이른바 "삼복"이라고 불리던 왕족들을 가두게 하라는 교지를 내리고(곧 철회되었지만) [[장희빈]][* 당시에는 [[후궁]]이 아니라 [[궁녀]]였다.]을 폐출시키는 데 개입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서인]] 출신이라는 영향 때문에 친[[송시열]] 적인 면모를 자주 보여 이 문제에도 자주 간섭했다고 한다. 사실상 이런 대비는 [[문정왕후]] 이후 최초였다고. 하지만 아들 숙종과 서인들마저도 그녀에게 부담을 느껴 "대비님, 지나친 간섭은 자제 좀…"이라는 상소가 늘어났고 그녀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명성왕후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장희빈]]은 궁으로 복귀해 숙종의 [[후궁]]이 된다. *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다만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과장되었다든지 공처가는 아니라는 반론도 많다. 하두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사이 나쁜 아내가 작곡하는 하이든 머리에 물을 확 뿌리자 하이든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음, 지금 태풍이 나오는 부분을 작곡하는데 그에 맞게 비가 확 왔군 그래."라고 말하며 작곡을 하자 아내도 기가 막혀 그냥 나갔다는 것. 이걸 두고 아내가 무서워 대들지 못하고 그랬다는 걸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신빙성이 없다.] *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 [[메리 토드 링컨]] * [[조선]] [[고종(대한제국)|고종]] - [[명성황후]] * [[미국]] [[워런 G. 하딩]] - 아내를 무서워하면서도 바람은 잘 피우고 다녔다. 심지어 지금까지 살아있는 후손도 불륜녀의 자손일 정도이다. 사실 이 정도면 진정한(?) 공처가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부분도 있고 당시의 여권이 현재 수준이 아니어서 그 정도는 했을 수도 있다. *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 * [[독일]] [[하인리히 힘러]] * [[중국]] [[저우언라이]] - 공처가의 면모가 있긴 하지만 사실은 지독한 [[애처가]]라서 그렇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그 옛날에도 상당히 로맨틱한 면모가 있었으며 그 당시 중국공산당 간부들 중에서도 부인과의 관계가 유난히 심했던(?) 모양이다. * [[영국]]/[[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 아내인 엘마 러바일을 깊이 사랑하기도 했지만 엘마가 영화 편집자의 능력이 뛰어나고 성깔도 있어서 히치콕은 항상 아내에게 수그리고 살아야 했다. 오죽하면 평소 영화에서 은근히 변태 성향이 드러나고 금발 미녀인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것을 매우 선호했으면서도 열애설이 한번도 나지 않았다. * [[루마니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 [[엘레나 차우셰스쿠]]''' 악랄하고 잔인한 인간이지만 아내한테는 꼼짝을 못했고 아내를 두려워해서 아내 앞에선 땀을 뻘뻘 흘리고 말을 버벅거릴 정도였다. * [[일본]] [[미즈키 이치로]] : 방송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항목에 보면 아내 역시 가수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