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주시 (문단 편집) == 관광 == 명승고적으로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정확히는 송산리고분군 중 하나이다.] 등 [[백제]]의 여러 유적지가 있고, 대표적인 시설로는 [[국립공주박물관]], 휴양지로는 [[계룡산]][[국립공원]] 등이 있다. 불행히도 상술했듯이 관리소홀과 지자체의 무관심에 관광 산업으로도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 몇 안 되는 관광지조차 전반적으로 유적 같은 조용한 분위기의 것들밖에 없다 보니 이런 쪽을 유난히 좋아하는 역사덕후 혹은 가족단위로 조용히 쉬러 온 거라면 모를까, 신나고 재밌는 분위기나 눈이 즐거운 볼거리를 기대하는 일반 관광객 입장에선 갈 만한 데가 딱히 없다. 과거 1990년대에 수도권에 있는 초등학교에서도 경주가 최소한 수학여행을 염두해두는 관광지였다면, 공주는 그냥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소풍 장소에 불과했으니 사실상 서울, 경주, 제주도, 설악산 만큼의 영향력있는 관광지로서의 입지는 그 당시에도 안 됐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의 말에 의하면, '괜찮은 유적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적발굴과 관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문화적 관광도시로 발전하지 못한 도시'''' 라고 했다. 발로 한 발굴로 유명한 [[무령왕릉]]과 현재도 발굴이 진행 중인 [[공산성]][* [[공산성]] 발굴은 1980년부터 시작됐으며, 현재도 [[공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 진행 중. 최근 화제가 된 [[백제]]의 옻칠된 갑옷이 이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시가지에서 참 멀리도 떨어져있는 변두리의 [[국립공주박물관]][* 거기다 박물관과 공주시내를 오가는 시내버스(108번)는 평일 60분/주말 120분(!!!) 간격이다. 본래는 강남의 비교적 시내에 있었으나, 이전 시 멀리 가버렸다. 그나마 배차간격이 짧은 101번이나 125번을 타고 와도 되는데... 고개를 넘어야한다. 거리는 약 600m. 예전에 국립공주박물관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충남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등, 유적지 관리 실태를 보면 맞는 말이지만 공주시에 거주하는 사람이 듣기에는 참 씁쓸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발굴과 관리의 문제인지, 공주시가 갖고 있는 문화자원의 한계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따져봐야 한다. 흔히들 신라의 고도인 [[경주시]]와, 백제의 고도인 공주/부여를 비교하면서 공주를 깎아내린다. 그렇지만 경주와 비교하기에 공주는 일단 역사적인 중심지였던 기간부터 정부 및 학계 차원에서의 지원, 세간의 관심까지 워낙 차이가 많이 나는지라... 경주는 천년왕국 신라와 그 역사를 같이 한 도시였지만 공주는 [[위례성]] 함락 후 피난온 일종의 '''임시수도'''였으며 그 기간도 60년 남짓이었다. 게다가 대한민국 수립 시까지 남아있거나 일제에 의해 조사라도 된 유적의 절대량부터가 넘사벽이다. 유적지 발굴이나 관리가 잘 되었다고 다 관광도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애당초 일제가 경주에 집중적으로 발굴 및 조사를 한 이유도 경주에 남아있는 문화재와 유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공주와 부여는 상술했듯 수도였던 기간도 짧았고 무엇보다 백제 멸망 과정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한 약탈과 방화 피해를 심각하게 입었다. 반면, 경주는 신라 역사상 침략자에게 무너진 것이 후백제 견훤의 침공 1회 뿐이었고 그나마 그 시기도 짧았다. 신라가 고려에게 얌전히 항복한 바람에 경주는 정복군의 약탈을 면했고 이후로도 동경으로서 그 지위를 인정받았다. 경주가 파괴당한 것은 [[몽골 제국]]의 침공때까지는 가야하는데, 어차피 이 시기에는 한반도 전체가 몽골군에게 짓밟히고 있었고.(...) 한 마디로 애초부터 공주에 관광도시로 발전할 만큼의 괜찮은 유적지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라는 것이다. 부여처럼 국보급 석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익산처럼 넓직한 절터와 왕궁터, 멋진 석탑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 [[공산성]]도 연지 정도를 제외하면 성곽과 문루가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이고, [[송산리 고분군]]은 발굴 유물의 가치야 높지만 '적석총'도 아니고 고분 자체에 구경거리는 없기 때문.[* 그나마 예전에는 무령왕릉을 개방했지만 관광객 개방으로 윈한 손상 및 고분 붕괴 위험으로 1997년부터 폐쇄했다.] 경주는 종합관광개발 이전부터 수많은 불상과 석탑이 남아있던 곳이었지만, 공주에는 그런게 전무하다. 공주에 [[석굴암]]이나 [[불국사]]같은 세계유산급 문화유산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백제시대 불상은커녕 석탑조차 없는 것이 공주의 현실이다. 경주나 부여에는 안압지나 궁남지 같은 크고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데, 공주에는 기껏해야 공산성 연지 같은 작은 연못밖에 없다. 그래도 백제에서 눈을 돌리면, 석장리 고분군이나 [[마곡사]], 갑사, 동학사 등의 사찰, 충청감영 등의 관아시설이 있긴하다. 우금치와 고마나루도 있고... 그러나 딱히 역사도시의 위엄에 맞는 타이틀 유적은 아니다. 애초에 [[유홍준]] 교수가 공주시의 문화재 관리에 대해 비판했던 요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해결이 되었다. 예컨대 [[국립공주박물관]]의 경우, 위의 문단에서는 과거위치보다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비판을 하는데, 오히려 송산리고분군과 충청감영공원, 공주한옥마을 등 문화재 밀집공간에 위치한 것으로 매우 탁월한 장소에 지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유홍준]] 교수가 가장 크게 비판했던 것이 '무령왕릉이 중요한 이유는 이 곳에서 발굴된 유적들 때문인데, 정작 이 유물들은 엉뚱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국립공주박물관의 위치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무령왕릉 옆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유홍준]]의 주장을 긍정한다면 국립공주박물관의 지금의 위치는 매우 적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적발굴도 점진적으로 이뤄지면서, 공산성에서 '백제시대 목곽고'가 발견되기도 했고, 백제시대 관청건물지와 백제 사다리가 발굴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딱히 관광도시로 발전하는데 힘을 얻을 법한 발굴성과는 아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대통사|대통사터]]가 발굴된 것은 고무적인 성과라 볼 수 있겠다. 이런 점을 종합해보면 공주시가 세계적인 역사도시로 도약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관리의 문제가 아닌, 그냥 공주시가 갖고 있는 문화자원의 한계일 수도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주에 볼 게 없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관광도시로 발전한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백제에서 눈을 돌리면, 석장리 고분군이나 [[마곡사]], [[갑사]], [[동학사]], [[신원사(사찰)|신원사]] 등의 사찰, 충청감영 등의 관아시설이 있다. 역사적 의미와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우금치와 고마나루도 있고... 특히 충청감영공원의 경우 인근의 송산리고분군, 한옥마을과의 연계가 가능하다. 마곡사나 갑사, 동학사는 보물급 문화재를 다수 보유한 사찰이기도 하다. [[지당자연사박물관]]이나 충청남도 역사박물관도 관람하기에 좋은 박물관이다. 또한 인접한 [[부여군]]과 백제문화제도 매회 개최하기고 하니까 백제 관련 컨텐츠 부분에서 두 지방자치체가 연계하면 더 컨텐츠가 늘 여지가 분명 있다.[* 공주와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던 기간은 각각 63년, 122년에 불과하지만 두 도시는 매우 가까워 하나의 권역이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사비성이 위치한 부여읍은 공주시와 접경해 있고 웅진성과 사비성의 거리도 고작 27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두 도시가 수도였던 기간을 합산하면 185년으로 거의 200년에 육박한다. 이 정도 기간은 충분히 긴 기간이라 볼 수 있으며 남한에서 이 이상 수도를 유지한 도시는 서울과 경주밖에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