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종(송) (문단 편집) === [[황제]]로서의 [[삶]] === [[송도종]]의 6남으로, 황후 전씨(皇后 全氏) 소생이다. 동복형[* 도종의 정실, 후실이 낳은 아들 중에서는 둘째 아들에 해당함.] 조서(趙舒)가 유아기때 사망하였고 도종의 첫 아들인 광충선왕(廣沖善王) 조작(趙焯) 역시 2살때 사망해서 사실상 도종의 적장자였다. 1273년 가국공(嘉國公)에 봉해졌으며 1274년 아버지인 도종이 34살의 나이에 사망하면서 겨우 4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도종의 살아있던 아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숙비 양씨 소생인 익왕(益王) 조시(趙昰)이다. 휘를 고쳐 조하라고 부른다. 공제 즉위 후 길왕(吉王)에 봉해졌으며 훗날 [[단종(송)]]이 되었다.] 도종 생전에 양양이 몽골군에게 함락되면서 대몽골 방어선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원나라]]는 옛 남송의 투항군을 흡수한 대군을 이끌고 공세에 나서 장강 상류의 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이 때 [[가사도]]는 원나라 대장 [[바린 바얀]][* [[한자]]로는 '백안(伯顔)'으로 표기됨]에게 화의를 구걸했으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심한 공세를 당했다.[* 원나라가 이전에 가사도의 화의를 받아들여 준 것은 내부 황위 계승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사라지고 양양도 함락한 이 시점에서 원나라가 남송이 요청한 화의를 받아 줄 리가 만무했다.] 가사도의 화의가 실패로 끝나게 되자, 과거 가사도의 거짓말[* 가사도는 몽케 칸의 침략 당시, 악주 지방 사령관이었다. 그는 이종과 조정에 알리지 않은 채 몽케 칸의 죽음으로 급히 돌아가려고 한 쿠빌라이와 몰래 '밀약' 을 맺고 쿠빌라이의 철수를 보장해주는 대신 부교를 놓고 강을 건너 철군하는 쿠빌라이 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모션을 취했다. 가사도는 이때 쿠빌라이 군에게 경미한 피해를 입혔는데, 밀약 내용을 숨기고 자신이 쿠빌라이 군을 배후에서 공격했다고 조정에 보고해 공을 획득했다.]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송나라 조정은 가사도에게 13만 군대를 이끌고 바얀이 이끄는 20만의 원나라군과 싸우게 했다. 가사도는 어쩔 수 없이 출전했으나,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한 큐에 박살남으로써 남송의 멸망은 기정 사실화되었다. 1276년 바얀이 이끄는 원나라 대군이 수도 임안을 포위했다. 남송의 조정은 화의를 요청했으나 원나라 측은 당연히 거절했다. 이때 바얀은 “[[조광윤|너희 조상]]이 어린 황제([[후주#s-2]](後周)의 공제 [[후주 공제|시종훈]])의 자리를 빼앗고 [[북송|나라]]를 세웠다. 그러니 그 후손인 어린 황제 때 나라가 망하는 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라면서 힐문했다고 한다. 결국 공제는 할머니 사태후, 어머니 전태후 등과 함께 항전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장세걸]], [[육수부]], [[문천상]] 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단종(송)|익왕 조하]]를 황제로 옹립하고 남쪽으로 도망쳐서 계속 항전했다. 그러나 남송은 공제의 항복으로 사실상 멸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