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융 (문단 편집) === 최후 === 공융은 이미 조조라는 사람이 점차 [[간웅]]으로서의 기질을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조조를 감당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공융은 자꾸 비꼬는 말을 내뱉었다. 그것이 조조와 공융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또 일찍이 고대의 왕기제도(王畿制度)에 따라서,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 1천리 내에는 제후를 봉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조조로부터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조조는 그 일로 더욱 공융을 꺼렸다. 그러나 공융의 지명도가 워낙 높았으므로, 겉으로는 서로 참고 용인하는 것처럼 했지만, 속으로는 그와 정론을 펼치는 것을 기피하면서, 공융이 자신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했다. 조조는 외부적으로는 공융에 너그러운 척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끙끙 앓고 있었다. 208년 8월, 조조는 이미 공융을 싫어하는 마음이 쌓였다. 공융과 사이가 나빴던 [[치려]]라는 인물을 현대의 검찰총장격인 [[어사대부]]에 임명했고 치려 또한 조조에게 영합되기 위해 관직을 이용해 공융의 죄를 날조해 고발했다. 공융이 파직되자, 실질적인 배후에 있던 조조는 표면적으로는 치려와 공융 사이를 중재해주는 척 하며 회유에 나섰지만, 공융이 고분고분하게 따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침내 승상군모좨주(丞相軍謀祭酒) 노수(路粹)를 시켜서 다음과 같이 공융을 모함하는 상주(上奏)를 올리도록 하였다. >소부 공융은 예전 북해에 있을 때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함을 보고 무리를 끌어 모아 불궤(不軌)를 꾀하고 이르기를 > >"내 [[공자]]의 후손으로 조상은 송나라에서 멸문을 당했었소. 천하를 소유할 자가 어찌 묘금도[* 卯金刀-'卯', '金', '刀' 세 글자를 합하면 '劉' 자가 됨.]만 있겠소?"하였으며 [[손권]]의 사자와 더불어 이야기하며 조정을 비방하였습니다. 또한 공융은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라서도 [[조정]]의 논의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며 맨머리에 미복(微服)을 하고 당돌하게도 궁궐을 다녔습니다. 또한 전에는 평민이었던 [[예형]]과 더불어 방자하게 말하기를 "아버지가 자식에게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본래 의미를 논한다면 실상 부부 사이의 [[욕정]]이 나타났을 뿐 아닌가.[* 부부관계의 결과로 자식이 태어났을 뿐이라는 말이다.] 자식이 어머니에게 또한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비유컨대 물건을 병 속에 두었다가 꺼내면 병과 떨어져 상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네.[* '父子有親' 등은 인간 본연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하고는 예형과 더불어 서로를 칭찬하였습니다. 예형이 공융에게 일러 말하기를 > >'중니(仲尼)께서 죽지 아니하셨소.' > >하였사옵고 공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 >[[안회]]가 다시 살아났구려.' 하였습니다. > >"이처럼 대역 무도하니 마땅히 무겁게 주벌하소서." 글이 상주되니 공융을 하옥하고 기시(棄市)[* 죄인을 참하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내버려 두는 형벌이다.]되었는데, 이때 나이 55세였다. 그의 아내와 자식 모두 주살되었다. 이때의 죄목이 불효죄였다. 공융이 죽기 10개월 전에 원소 집단이 붕괴했고, 전 달에는 [[유표]]가 죽었으며, 조조는 막 삼공을 폐지하고 승상에 오른 시점이었다. 양대 주적이 모두 박살났으니 더 이상 거리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듯 하다. 공융을 처형한 표면적인 이유는 위에서 나오듯이 [[예형]]과 함께 서로를 성인(聖人)인 공자와 [[안회]]로 지칭한 불경을 범했으며, 기근이 들어 모두 죽게 생겼을때 아버지가 불초한 인간이라면 그를 살리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낫다는 패륜적인 주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공융은 효(孝)라는 개념을 타산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정작 공융이 효자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데, 이와 같은 그의 효의 해석은 당시 유가적 미덕으로 칭송받던 청렴이나 효행이 본질은 없어진 채 오로지 과시적인 허례로 악용되던 사회상을 비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후한 말 영제의 철권과 극심한 정치적 부패에 대한 반발은 유가적인 미덕인 청렴함과 효행을 극단적으로 과시하는 원리주의적 풍조로 이어졌는데, 이는 효가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당연한 고마움의 감정이 아닌 단순히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겉치레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런 분위기에서 몇몇 인간들은 일부러 자기학대에 가까운 고행을 통해 명성을 얻는 등, 효를 정치적 출세에 악용했다. 위선적 행동양상은 후한 사대부 전체에 만연했던 풍조인 만큼 조조 진영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후의 시대인 위진시대까지도 이런 기풍이 이어졌다. 본질을 살펴보면 공융은 과격한 언사를 통해 변질된 효를 실천한 인사들의 위선성을 비판한 것이다. 다만 조조는 한이 충과 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이념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는데, 공융은 효에 대한 개념을 단순히 타산적으로 해석했으니 국가이념을 뒤흔드는 것이라는 억지를 부리며 처형한 것이다. 그는 아들이 둘(후한서에서는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어 형은 6살, 동생은 5살이었는데, [[세설신어]]에는 낮에 공융이 잘 때 동생이 술을 훔쳐 먹었더니 이를 본 형이 어찌하여 배례를 않느냐고 묻자, 동생은 훔쳐 마시는데 무슨 예를 행한단 말인가라고 반문했으며, 언어라는 책에 [[종회]] 형제와 관련해 비슷한 고사가 실려있어 이 고사가 와전된 내용으로 추측된다. 아버지인 공융이 죽임을 당할 당시에 형은 9살, 동생은 8살로 두 사람은 [[바둑]][* 위씨춘추에서는 바둑, 세설신어에는 못치기놀이로 나오며, 위씨춘추에는 공융이 손권의 사자를 모욕해 기시형을 겪은 것으로 나온다.]을 두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도망가라고 급히 알려주니 "둥지가 깨졌는데 그 안의 알이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하더니 두던 바둑을 계속 뒀다고 한다. [[세설신어]]에서는 저 일화가 못치기놀이로 나온 것 말고도 조비가 원희의 처를 받아들인 뒤에 조조에게 편지를 보낸 이야기, 그의 아들과 딸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을 대접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의 아들과 딸이 연약한 어린아이였므로 그들의 목숨을 보전시켜 다른 사람의 집에 기거하게 했는데, 그 집의 주인이 고깃국을 보내주어 아들이 그것을 마시자 딸이 오늘 같은 화를 당했는데 어떻게 오래 살 수 있겠냐면서 무슨 믿는 구석이 있다고 고깃국 맛을 알겠어요?"라고 질의했다.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그 말을 알리자 그들은 체포되어 여동생이 오빠에게 "만약 죽어서도 지각이 있어서 부모님을 뵐 수 있다면 어찌 지극한 바람이 아니겠어요?"라고 말한 뒤에 당당히 목을 길게 내밀었다고 한다. 공융은 권세를 잃고 실각한 뒤부터 처형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집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날마다 빈객이 그의 문하에 가득했다고 한다. 공융 자신은 인재를 아끼고 선비를 좋아해 늘 부족한 듯이 여겼는데, 그러면서도 매번 좌중에 상객이 늘 가득하고 술이 떨어지지만 않으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라 탄식했다고 한다. 한편 진서 양호열전에 [[양신]]의 전처가 공융의 딸이라는 기록이있다. 저서로 《공북해집(孔北海集)》(총 10권), 《천예형표(薦禰衡表)》 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