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융 (문단 편집) === 조정의 [[야당]] === 허도로 간 공융은 장작대장에 천거되었다가 다시 소부로 전임되었는데, 장작대장으로 재임하던 197년, [[원소(삼국지)|원소]]와 [[조조]]가 대장군 직을 두고 대립한 끝에 조조가 대장군의 자리를 내놓았을 때, 공융은 지절을 받아 업으로 가서 원소에게 대장군의 작위를 수여하는 칙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공융은 결코 조조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며, 조조를 매우 비판적으로 대했는데, 조정에서 조회를 열 때마다 그는 늘 정론을 펼쳐 의견을 주도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무렵 공융은 [[순욱]]과 설전을 벌였는데, 그들이 논한 주제는 [[원소(삼국지)|원소]]군의 상장인 [[안량]]과 [[문추]]의 자질이었다. 순욱은 안량과 문추에 대해 '''필부의 용맹을 가진 장수'''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과소평가를 한 반면, 공융은 안량과 문추에 대해 '''삼군을 이끌 만한 장수'''라며 극찬했는데, 나중에 순욱의 안목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당초에 태부 [[마일제]]가 사신이 되어 산동으로 갔다가, 회남에 이르러 원술과 만났다. 원술은 그를 가볍게 여기며 모욕을 주고 마침내 마일제가 지닌 부절을 빼앗았다. 마일제가 다시 달라고 하자 원술은 듣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협박을 했다. 마일제는 그것이 너무 창피하고 한스러워서 결국 피를 토하고 죽었다. 마일제의 시신이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그의 장례를 어떻게 치룰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려고 했다. 아무도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자, 공융이 홀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마일선은 상공의 존엄한 자리에 있으면서 모절을 든 사신이 되었습니다. 명을 받들어 흔들림 없이 그대로 동하를 평화롭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눈웃음이나 치는 간신들에게 휘둘려서 장표에 서명이나 하는 사람으로 으뜸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윗사람을 기망하였으니, 간사함으로 군주를 섬겼을 뿐입니다. 옛날에 국좌는 진나라 군사들과 마주쳤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의료는 칼날 앞에서도 정색을 했습니다. 왕실의 대신이 되어 어찌 협박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또 원술이 역모를 꾸민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마일제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오랫동안 한의 율법을 어긴 죄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죄를 사해주거나 적당히 무마하는 일에 전념했을 뿐입니다. [[원술]]을 만나고 3일이나 지났으면 모든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춘추시대 노나라의 숙손득신이 죽었을 때, 양중의 죄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죽은 날자를 기록에 남기지 않았습니다. 정나라 사람들은 유공의 난을 토벌하고 자가의 관을 깎았습니다. 황제는 옛 신하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차마 지난 일을 공안에 붙이지 못하고, 마일제의 장례에 특별한 예를 더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정도 황제의 명에 따랐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마일제를 다시 육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공융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옛 사람은 크고 두터우면 옭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관리들이 올곧으면 형벌이 밝아진다고 했습니다. 정치가 지나침이나 빠짐이 없는데도 백성들이 죄를 지는 것은 모두 스스로 저지른 짓입니다. 세상이 기울어지면 풍속을 교화하는 기능이 무너지고, 정치가 흔들리면 법이 사람들을 해칩니다. 그러므로 상류층이 도를 상실하면 백성들이 흩어진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묶으려면 고대의 형법인 신체를 손상시키는 법률을 버려야 했습니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서 저절로 늘어나거나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 >은(殷)의 [[주왕]](紂王)은 아침에 냇물을 건너는 사람을 보고 정강이를 발랐기 때문에 천하의 사람들이 무도하다고 했습니다. 구목(九牧)의 땅에는 1,800명의 군주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한 사람씩 월형(刖刑)으로 처벌했다면 천하에는 1,800명의 주왕이 있었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야 풍속을 아름답고 온화하게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또 형벌을 받는 사람은 온전하게 살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더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숙사(夙沙)는 죽음을 각오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려(伊戾)는 송나라의 화근이 되었으며, [[조고]]와 [[영포]]는 세상에 큰 우환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적당한 조치를 취하여 옳은 길로 유도를 하는 것이 낫습니다. > >비록 죽권과 같은 충성심과 변화와 같은 믿음과 [[손빈]]과 같은 지혜와 [[사마천]](司馬遷)과 같은 재능과 항백과 같은 억울함과 자정과 같이 모든 학문에 통달한 사람이라도, 칼질 한 번이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맙니다. 이는 [[태갑]]이 항상 도를 생각하게 된 것과 [[진목공]]이 진(秦)나라를 패자로 만든 것과 남수가 뼈를 세운 것과 위무공이 초연을 베푼 것과 진탕이 모든 일을 주관했던 것과 위상(魏尙)이 변경을 수비했던 것과 같은 경우는 다시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한왕조가 개국을 하여 개악(改惡)의 길을 걸은 것은 대개 이와 같은 사례를 참고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밝은 덕을 갖춘 군주는 멀리 헤아리고 깊이 사유함으로써, 단점을 머리고 장점을 취하면서 정치적 개혁을 구차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옳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그것을 고치지도 않았습니다. 속한서(續漢書)에 따르면 태위 [[양표]]는 원술과 사돈관계였고, 원술은 황제를 칭하려 하였으므로, 조조와 양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양표를 붙잡아 죽일려고 했다. 공융이 이 소리를 듣고 조복을 입지도 않고 조조를 만나서 말했다. >양공은 4대에 걸쳐 밝고 바르게 천자를 섬겨 그 덕망을 모두가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주서(周書)는 "부자형제까지 죄는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춘추좌씨전]]에서 강고는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들이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으며, 형이 아우를 우애하지 않고, 아우가 형을 받들지 않더라도, 그 죄는 당사자에서 그치고 부자와 형제까지 미치지 않는다.' 라고 했다.] 지금 원술 때문에 양공까지 죄를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주역에는 적선여경(積善餘慶), 즉 덕행을 많이 행한 집안은 그 자손들이 그 덕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양표가 하옥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그것은 국가의 일이지, 내가 알바 아니오.[* 죄가 있고 없고는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할 일이라는 것이다.] 공융이 말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나라 시대에 창업주인 [[주무왕|무왕]](武王)이 귀국한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어린 [[주성왕|성왕]]이 등극하고 무왕의 아우인 [[주공단|주공]]이 섭정을 했습니다. 주공은 그의 아우인 소공(召公)과 의논하여 정사를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제 열 살도 안된 어린 성왕이 소공을 죽였다고 한다면, 주공의 입장에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지금 천하의 대신들과 선비들 중에서 명공(조조)을 우러러 보면서 따르는 자들은, 공의 총명과 인지로서, 한나라의 조정을 도와가며 다스리고 , 바른 자들을 천거하고 , 요상한 것을 버리고 하는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고한 사람을 느닫없이 죽이는데,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듣는다면, 도대체 누가 명공을 따르겠습니까? 공융은 노국(魯國) 남자로, 내일 옷을 벗고 되돌아가서, 두번 다시 조정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조조도 어쩔 수 없이, 양표를 풀어주라고 하였다. 공융은 조정의 무력함에 대하여 꽤나 한탄했던 듯하다. 당시에 형주목 [[유표]]는 공납을 바치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거짓말을 하다가 마침내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낼 때 마치 천자가 가마를 타고 가는 것처럼 했다. 조칙을 내려 그것을 질책하려고 하자 공융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영형주목 유표가 방자하게도 법도를 어기다가 마침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마치 사직을 갖추려는 것처럼 의식을 진행했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우매하여 극악한 짓을 저질렀지만, 그 죄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지엄한 국체(國體)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만승(萬乘)은 지극히 엄중하고, 천왕(天王)은 지극히 존엄하기 때문에 그 몸을 성스럽게 여겨야 하며, 나라의 신기(神器)가 되어야 합니다. 계급(階級)은 멀리 걸려 있으며, 녹위(祿位)는 한계와 등급이 있습니다. 오히려 하늘에는 계단이 없으므로 해와 달까지는 뛰어넘지 못합니다. 하찮은 신하라도 이러한 법도를 어기면 빨리 제거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만약 사방에서 이러한 조짐이 나타나면 그 싹을 미리 막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비록 중대한 잘못이 있어도 그것을 감추어주고 참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의는 그와 같은 관용은 [[쥐새끼]]에게 그릇을 던져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제나라 군사가 초나라는 제쳐두고 풀을 거두지 않을 것을 책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 왕사가 패했음에도 진나라 사람들을 기록에 남기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 >전에 원술(袁術)의 죄는 폭로하고 지금 유표에 관한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은, 높은 언덕을 볼 때는 말뚝이라도 사용하지만 천험의 높은 산은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유표의 발호(跋扈)를 살펴보면, 자기 마음대로 열후(列侯)를 죽였고, 조칙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공비(貢篚)를 끊고 도둑질을 했습니다. 또한 아주 흉악한 무리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오로지 주상에게 반역을 할 생각을 품은 자들이 연수(淵藪)로 모여들고, 고정(郜鼎)이 대묘에 있으니 이보다 심한 경우가 또 있겠습니까? 뽕잎이 떨어지고 기와장이 깨지는 것을 보면 그 정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유표가 제사를 지낸 일은 모른 척하는 것이 나라의 권위를 세우는 길일 것입니다. 건안 5년에 [[헌제]]의 아들이었던 남양왕(南陽王) [[유풍]](劉馮)과 동해왕(東海王) 유지(劉祗)가 죽었다. 황제는 일찍 죽은 그들이 불쌍하여 사계절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한편, 공융에게 제사에 참석하도록 했다. 공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성은이 두텁고 따뜻하셔서 계절이 지날 때마다 더욱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두 왕의 영령을 애도하시며 슬프고 불쌍한 마음을 담은 조칙을 내리시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전의 규정을 살펴서 예제(禮制)는 바르게 시행하셔야 합니다. 신이 홀로 지난 사례를 살펴보니, 양회왕, 임강민왕, 제애왕, 임회회왕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모두 경제, 무제, 소제, 명제와 같이 태어난 현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조에서 제도를 고쳐 제사를 지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만약 임시로 그러한 조치를 내렸다면 열전이나 본기에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분들이 모두 어려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황제께서 그것을 슬퍼하여 어른과 같은 예를 갖추고 시호를 더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주상의 은혜를 가늠하여 제사를 마친 후에는 어 이상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고작 한 살인 경우에는 더욱 예와 일치되지 않을뿐더러 선대의 황제들이 남긴 법도와도 일치되지 않으니 그렇게 하시지 않아야 합니다. 뒷날 [[원소(삼국지)|원소]]가 죽고 조조가 원소의 후계자 [[원상]]을 격파하여 업을 함락했을 때, 조조와 조씨 일족은 많은 원소의 딸과 며느리들을 범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원희]]의 부인이었던 [[문소황후]]를 빼앗아 강제로 처로 삼은 것이다. 공융은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왕(주)|무왕]]은 [[제신|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를 [[주공]](周公)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조조와 조씨 일가를 조롱하는 말이었는데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하던 조조는 공융이 워낙 박식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웃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융이 경전을 인용해 자신을 두둔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찾아봐도 그런 고사를 찾지 못했기에 나중에 공융을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어떤 책에서 발췌했냐고 물어봤는데 공융은 "지금의 일을 살펴보니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사용한 단어인 상당연(想當然)은 관용문구로 남게 되는데,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뜻이다.] 즉, 공융은 실재하지 않는 고사를 거짓으로 지어내 말함으로써, '오늘날 조조 일족의 행태는 성현의 행적과 대비되는 부도덕한 일이다.'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말한 것이다. 그제서야 조조는 공융이 자신의 행동을 비꼬는 정도를 넘어서 역사와 고전도 모르는 무식쟁이[* 달기와 비슷한 행적을 보인 중국의 4대 미녀 서시의 최후는 기록이 다양하다. 그래서 조조는 서시랑 혼동했던지 했던거 같다.]라고 까댄것을 알았다.~~죽여달라고 비는 수준~~ 이후 하북을 평정한 조조가 오환 원정을 계획하자, 나서는 김에 옛날 숙신이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정령족이 [[소무]]의 소와 양을 훔친 것까지 다스리지 않겠느냐며 비웃었다고 한다. 이 말인즉, 내부적으로도 할 일이 많은데 그렇게 밖으로 돌 테면 나서는 김에 아예 옛날옛날부터 있던 온갖 시시콜콜한 일까지 다 처리하고 오라는 말이며, 한편으로는 조조가 정벌하지도 못할 곳까지 생각없이 함부로 나서대는 얼빠진 사람이라고 비웃는 말장난이기도 하다. 또한 오환 원정 당시 군량이 모자랐기에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이를 반박하는 글을 올리며 조조와 논쟁하기도 했다. 식량난은 곧 자신의 치세가 그만큼 좋지 못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조조는 "옛 암군들이 술에 빠져서 나라 망쳤다"는 구실을 댔다. 공융은 "여색 때문에 나라 망친 일도 적지 않으니 여자도 금합시다."라며 허를 찔렀다. 물론 공융이 반대한 이유는 극히 사적인 이유도 포함되었으며, 그것은 곧 자신이 술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 일화는 [[세설신어]]에서도 언급되는데, 공융이 제례를 지내기 위해서 술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공융의 인기가 높아졌으며, 세설신어에서는 조조가 공융을 죽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공융의 금주령 반대에 대해서는 여론이 좋았던 듯하다.[* --그야 그렇겠지--] 중국의 근대 학자인 [[루쉰|노신]]은 이에 대해 "그때 내린 조조의 금주령은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경세가라는 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조조는 그때 '현실'을 책임진 조정의 경세가였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융은 야당의 방관자 입장이었으므로 자기 멋대로 함부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