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융 (문단 편집) === 북해상 === 북해에 도착한 공융은 북해상으로써 백성들을 수습하였고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다. 한편에는 청주의 각 군현에 격문을 보내어 세력을 집결시켰고 방비를 굳게 했다. 덕분에 황건의 수령이었던 장요(張饒)는 식량을 약탈하지 못했고, 20만의 무리를 이끌고 기주로 돌아갔다. 이를 안 공융은 역습에 나서 황건적을 패주시키고 각 현을 수복했다. 또한 흩어져 있던 관리와 백성들이 점차 모이자 황건적으로 오인되었던 4만 명의 남녀 백성들을 중심으로 다시 성읍을 조성했다. 황건이 다시 침략을 하자 공융은 곧 도창(都昌)에 주둔했다. 그러나 황건의 [[관해]]에게 포위되자, 다급해진 공융은 청주 동래군 출신 [[태사자]]를 평원상 [[유비]]에게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유비는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공북해는 천하에 유비가 있음을 다시 알게 해 주었던 사람이다." 유비는 3천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공융을 구원하도록 했다. 유비의 구원병이 오자 적은 도주했다. 황건의 잔당을 모두 격파하고 성읍을 수복하자, 학교와 상서(庠序)를 세우고 현명한 인재들을 천거하여 유학자들을 세상에 진출시켰다. 또 후손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나, 사방을 떠돌다가 죽은 사족들을 모두 나무로 만든 관에 넣어서 장례를 지어 주었다. 군민들 가운데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졌다가 일찍 죽은 사람이 있으면, 공융은 자신이 그를 돌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여 곧 현에서 사당을 지어주도록 했다. 그 밖에도 한 가지라도 선행을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어 대함으로 유가적 덕성의 회복을 장려했다. 죽으라고 보낸 곳에서 멋진 성공을 거둔 셈이지만, 공융의 정치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면에 치중돼 있던 모양인지 왕수전에 의하면 호족들이 그를 만만하게 본 듯하다. 더하여 현실적인 감각이 빠졌다는 비판이 많았다. 구주춘추의 기록들은 그를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에 따르면, 그는 비록 법치에 기반한 정치를 잘 펼치려고 노력했지만, 제대로 실행되는 법은 없었으며, 단지 문제를 끌어다 망라하는 것에 능할 뿐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점에 있어서는 소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보좌해야 할 측근들을 임용함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었다. [[좌승조]]와 [[유의손]]이라는 인물들이 책모에 뛰어나 준재라는 평판이 있었지만, 공융은 이들의 명성이 높았기에 어쩔 수 없이 높은 자리에 앉혀만 뒀을 뿐, 절대로 이들을 중히 쓰지 않았고 그들의 진언도 받아들이는 일이 없었다. 대신 그저 빈말을 잘하고 별 재주가 없던 왕자법과 유공자라는 인물들을 총애하며 중용했다고 한다. 구주춘추의 기록들은 공융의 군사적 행적에 대해서도 여러 모로 비판을 하고 있다. 유주의 군사 수만 명이 북해를 공격하자[* 산동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공손도]]와 대립한 것으로 보인다.] 청주 전역이 모두 두려워하며 떨었지만, 공융은 기습공격을 통해 이들을 대파하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모조리 배반한 뒤 본국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또한, 그가 황건적 잔당과 재차 싸울 때, 공융은 승리를 과신했는지 술에 만취한 상태로 친히 지휘했지만, 황건군은 중군은 공융과 맞붙으어 견제하는 와중에 좌우익은 우회로 기동하여 강을 건너 공융의 본성을 함락시켰다. 공융은 그 해가 지나도록 성을 되찾지 못하다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자 북해를 버리고 서주로 달아났다. 이후 그는 다시 북해로 돌아갔고, 유비의 추대를 받아 영청주자사가 됐다(195년?) 당시 [[원소(삼국지)|원소]]와 [[조조]]가 두각을 드러내지만, 공융은 이들과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좌승조는 공융에게 충고를 했는데, 원소와 조조가 강하니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붙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충고를 무시하며 공융은 좌승조를 죽여버렸고 이에 유의손은 공융을 버리고 떠났다고 한다. 후한서에 따르면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당시에는 [[조조]]와 [[원소(삼국지)|원소]]가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공융은 어느 쪽으로도 붙지 않았다. 좌승 [[황조]]가 공융에게 어느 한 쪽으로 붙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그러나 공융은 원소나 조조가 결국은 한왕실을 없앨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화가 나서 좌승 황조의 말을 시류와 권력에 영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기에 대노하여 좌승조를 처형했으며, 유의손은 공융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후한서]]를 지은 범엽은 구주춘추처럼 세세하게 좋지 않은 내용은 넣지 않았으나, 좌승조의 일화를 소개하며 공융은 높은 뜻이 있고 왕실을 보좌하며 난세를 평정하려는 뜻을 가진 충신이었지만, 그의 기질이 너무 올곧았기에 넓은 시야를 가지지 못했다고 그의 저서에서 공융을 평가했다. 범엽의 평이나 공융이 이전부터 좌승조 등을 싫어했다는 점, [[원소(삼국지)|원소]]나 [[조조]]에게 붙으라고 권유했던 점을 감안하면, 좌승조 등은 비록 냉철한 안목은 있었지만, 공융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던 것 같다. '산동을 귀부시키고 밖으로 요동과 맞붙어 군사적 이득을 얻고자 하였으며, 한 구석에 홀로 기초를 세워 (원소, 조조와) 함께 하지 않았다'는 구주춘추의 기록을 생각하면, 공융은 청주를 평정한 뒤 요동의 [[공손도]]와 결전을 벌여 요동-청주를 아우르며 원소, 조조와는 독립된 세력권을 구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196년 1월에 서서히 세력을 넓혀 가던 [[원소(삼국지)|원소]]의 세력권과 충돌하여 마침 [[전해]]를 격파하여 기세를 타던 [[원담]]을 맞아 전투를 하였다. 계절이 지나 여름에 이르기까지 수개월 교전한 끝에 공융은 거듭 패배하여 끝내는 불과 수백 명의 군사만 남은 채로 농성하는 상황에 몰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에는 성을 잃었다. 성이 점령당하는 날, 공융은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그의 바로 옆에까지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전혀 안색이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책을 읽으며 평상시와 같이 행동하는 등 무척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평소에 정무를 내팽개친 채 책이나 읽을 정도로 한심한 인간이라는 것이 구주춘추가 묘사하는 공융이다. 태도만 의연하게 허세를 부렸기에 망한 한심한 인물이라는 뉘앙스가 강하지만, 후한서에서 묘사되는 그는 그렇게까지 한심한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절대적인 열세에 몰려 별다른 방도가 없던 상황에서 보였던 공융의 초연함과 당대의 다른 군벌들과 달리 매사에 사소한 일로 공치삿거리를 만들지 않았던 것을 칭찬한다. 저렇게 초탈한 모습을 보인 것치고는 붙잡히지 않은 채 탈출에 성공했으나, 정작 공융의 가족들은 모조리 원담에게 포로로 붙잡혔다고 한다. 마침 이 무렵은 [[조조]]가 [[헌제#s-2|헌제]]를 막 옹립했을 때였고, 헌제 또한 자신을 충심으로 보필할 인재가 필요했기에 직접 조서를 내려 공융을 불렀다. 이에 공융은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지만,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