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융 (문단 편집) === 극과 극을 달리는 평판 === 공융에 대한 사가들의 '''평가는 양극으로 극단적으로 갈린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공융의 전기를 따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최염전의 말미에 부록으로 공융의 행적을 매우 간략하게 언급하며 오만하게 굴다가 죽었다고 적었다. 더불어 사마표는 구주춘추에서 공융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특히 청주에서의 공융의 행적을 두고 조목조목 따지며 비판하는데, 대체로 말만 앞섰지 제대로 실행되는 게 없었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고, 재주는 얕은데 이상만 가득한 인물로 표현한다. 위나라의 적국인 촉나라에서조차 공융을 순교자로 포장해서 조조를 공격하는 명분으로 써먹기는 커녕 반대를 위한 반대로 혼란만 불러일으키는 분탕종자로 취급했다. 제갈량은 [[내민]]을 파직시키면서 공융보다 더한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고 직접 언급했다. 유비가 평원-서주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공융과는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이란걸 제갈량도 모를리가 없을텐데 저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반조조 측에서도 저걸 단점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후한서]]를 지은 범엽은 공융을 [[순욱]], [[정태]]와 더불어 후한의 마지막 충신으로 평가해 세 사람을 같은 열전에 묶었다. 공융에 내린 범엽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공융은 다른 사람의 선행을 들으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좋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부연해서 완성시켰다. 상대의 면전에서 단점을 직접적으로 지적했으나 뒤에서는 그 장점을 칭찬했다. 현명한 선비를 좋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발탁하여 명예를 얻게 했다. 선한 사람을 알고 있으면서 추천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잘못과 같이 여겼다.' >(중략) 마찬가지로 공문거의 높은 뜻과 외곬적인 행동은 사람들의 정의감을 불러일으켜 효웅의 야심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 때문에 조조도 살아있는 동안에 한의 천하를 빼앗지 못하고 아들의 대에 한을 대신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본디 곧은 성품의 사람은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숙명으로, 원만하게 다스려지도록 허리를 구부려 사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공문거는 순수한 백옥과 같아 준열(峻烈)함의 표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범엽 또한 공융이 청주에서 할거할 당시의 행적을 모르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사마표처럼 세세하게 따지지는 않은체, 공융의 성품이 너무 올곧다 보니 시야가 좁았다고 그의 장점을 높이 사는 동시에 그의 단점을 지적하였다. 당대 사가들 평가부터 이렇다보니 후대의 평가도 극단적이다. 같은 행적을 두고서도 부정적으로 보는 쪽은 죽을 만해서 죽었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입만 산 인물이라 폄하하고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후한의 [[키케로]], 시대의 마지막 양심으로 평가하는 등 평이 심하게 갈라진다. 다만 당시 혼란스러운 곳이었던 청주에 좌천성으로 부임해서는 황건적을 몰아내고 통령체계를 회복했다는 자체를 감안하면 그는 절대로 가볍게 생각될 인물이 아니다. 그는 권력자들과 상성이 극단적으로 나빴는데, [[십상시]]→[[하진]]→[[동탁]]→[[원소(삼국지)|원소]]→[[조조]]로 이어지는 당대 최대의 권력자 계보에서 공융이 비판하지 않은 인물은 없다. 다만, 원소와 공융의 관계는 직접적인 기록이 많지 않고 오히려 관도대전 무렵 공융은 그에 대한 비관론을 펼쳤기에 친원소파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공융이 원소를 최대의 역적이라 여긴 것은 후한서에서 확인되고, 원소도 조조에게 공융을 죽이라고 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조는 여론을 의식해 거절하였다. 조조가 불효죄로 삼족을 멸했기에 건안칠자의 1명으로 꼽히면서도 다른 6명과 달리 전혀 언급되지 않는 등 조조의 시대에 거론되는 대상은 아니었으나, [[조비]]가 공융의 시를 특히 좋아했기 때문에[* 공융의 글을 볼 때마다 늘 양웅, [[반고]]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조조가 죽은 뒤에 공융의 시문을 모은 공북해집을 출간했다. 하지만 조조 시대를 거치며 공융의 글이 많이 사라진 탓에 조비는 남아있는 공융의 글을 신고하는 자가 있으면 황금과 비단을 내리며 포상했다고 한다. 공융은 글재주가 뛰어나 건안칠자의 일원이었고 [[조비#s-1|조비]]와 <[[후한서]]>에 남겨진 평에 따르면 '논리를 전개하고 이치를 따지는 측면에서는 부족했지만, 그는 창의적이었고 아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처형하기 직전 임종시(臨終詩)를 지어 죽는 순간까지 조조를 비판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그는 국가에 충성하고 효로써 세상을 교화한다는 유가적 이념을 끝까지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http://blog.naver.com/OpenMagazineViewer.nhn?blogId=neight_nesia&logNo=220015247604&categoryNo=7&parentCategoryNo=0&viewDate=|공융孔融:비틀린 시대에 용납되지 않은 비운의 천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