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양왕 (문단 편집) === 고려의 멸망 === >'금왕(今王)은 멍청하고 어두워 군도(君道)는 사라졌고 인심(人心)은 떠나갔습니다. 더 이상 사직 및 생령의 주(社稷生靈主)가 될 수 없으니, '''부디 폐(廢)하여 주십시오.'''' >---- > - 《고려사》 <공양왕 세가> 中. -[[왕대비 안씨]]에게 올린 [[배극렴]]의 상서- 결국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 1392년, [[정비 안씨|왕대비 안씨]]의 이름으로 공양왕은 폐위되었다. 북천동궁(北泉洞宮)에 있었던 공양왕은 엎드려 왕대비의 교지를 듣고 난 뒤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난[余] 본래 군(君)이 되고 싶지 않았다. 군신(群臣)이 날 강제로 세운 것이다. 내 성격이 민첩하지 못해 사기(事機)를 알지 못했으니, 어찌 신하(臣下)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겠는가."''' >---- > - 《태조실록》 중, 1392년 7월 12일. -공양왕의 반응- 공양왕의 [[옥새]]는 왕대비가 가져갔고, 국정은 왕대비의 명의로 처리되었다. 문하시중 이성계는 '''감록국사'''(監錄國事) 이성계가 되었다. 7월 16일 대비로부터 옥새가 전해지고 '''7월 17일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군주로 즉위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명나라의 책봉 이전이므로 '''권지고려국사'''라는 칭호를 이용했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34대 475년만에 멸망했다.''' 정몽주가 암살당한지 4개월만이었다.[* '고려'라는 국호 자체는 2년 정도 지속되었다. 이미 내부에서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지만 명나라의 책봉을 못받아 새 국호를 대외적으로 쓰지 못했다.] 이성계가 왕위를 단순 찬탈하고자 했으면 1388년 위화도 회군 때 이미 힘이 있었기에 그 시점에서 왕위에 올랐겠지만, 최대한 보기 좋게 왕위를 양위받고 싶었기에 세운 것이 공양왕이었다. 이성계가 양위를 원했기에 공양왕과 정몽주는 이성계를 나름대로 견제할 수 있었지만, 결국 공양왕이 절대로 양위할 뜻이 없다는걸 알자마자 공양왕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왕이 되었다. 《[[삼국지]]》의 [[조조]]-[[조비]] 부자나 [[사마의]]-[[사마사]]/[[사마소]]-[[사마염]] 3대가 '보기 좋은 선양'을 위해 허수아비를 앉혀놓고 공들인 수십 년의 시간에 비하면 고작 쿠데타 4년만에 다 죽이고, 왕이 된 이성계는 상당히 빨리 판을 뒤집은 편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성계는 여유부릴 시간이 없었다. 이성계의 낙마사건부터가 명 태조에게 입조하려는 세자 왕석을 배웅하러 갔다 벌어진 일이었으니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낸 공양왕이 후속 조치로 추진하던 명 태조의 책봉까지 받아내면 이미 이성계를 곱지 않은 눈으로 주시중인 [[주원장]]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 말고는 왕위에 오를 방법이 없었다.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위시킬 때 이미 명나라로 가는 책봉 요청 사절이 출발한 상태였고, 이성계가 가장 먼저 한 일 중에 하나가 급히 파발을 보내 사신단을 귀환시키는 일이었다. 백관들이 왕대비 안씨의 옥새를 받들어 이성계의 집을 찾았을 때 이성계는 사양의 뜻으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며 백관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몇 번의 사양 끝에 옥새를 받들었다. 또한 즉위식에서 자신의 몸이 성하지 못해 도망가지 못했다며 최대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는 짜고치는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