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손찬 (문단 편집) === [[계교 전투]] === 191년, 공손찬은 원소와 밀약을 맺고 [[한복(삼국지)|한복]]을 공격하여 격파하지만, 그 사이에 원소는 기주의 여론을 장악하고 한복을 협박해 기주목의 자리를 빼앗았다.[* 소설에서는 원소가 공손찬에게 기주를 같이 공격해 공평히 나누자고 제안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무엇을 조건으로 제시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학경]] 속후한서는 이를 191년 6월경, 자치통감은 같은해 7월 경의 기사에 붙여 넣었는데, 아무튼 대충 이 시점에 원소는 기주목이 되었다. 그런데 원술에게 파견되어 있던 공손월이 양성에서 친원소 성향의 주앙을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자 공손찬은 모두 원소의 책임이라고 하며 군대를 남쪽에 배치시켰다. 원소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공손찬의 다른 사촌동생인 공손범에게 발해태수의 지위를 양도하여 자신과 공손찬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지만 공손범은 오히려 발해의 군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가세하였다. 191년 11월, 청주의 황건적 30만이 하북으로 올라와 발해군의 경계를 침입했는데 공손찬은 보기 2만을 이끌고 이를 요격하여 별다른 전력 손실 없이 30만을 거의 몰살시킨 것에 가까운 엄청난 대승을 거뒀으며 이로 인해 공손찬의 위명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그러면서 원소군과 몇차례 소규모 교전을 펼치면서 군을 계교까지 전진시켰고, [[엄강]]을 기주자사로, [[전해]]를 청주자사로, [[추단]]을 병주자사로 삼아 각기 파견했으며 기주, 병주, 청주 모든 군현의 태수, 현령을 모두 자기 사람으로 임명했다. 형식상으로야 어디까지나 장안 천도 이후 연락이 끊긴 중앙정부의 부재 상황에서 부적임자를 대신해 임시로 적임자가 취임한다는 형식이었지만, 3개 주의 주, 군, 현에 배치된 기존 관리들을 모조리 실력으로 몰아내고 점거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노골적인 야심을 표출한 것이다. 또한 장안의 헌제에게 원소의 10가지 죄상을 알리는 상주문을 작성하고 포고한다. 이때 수많은 군현이 원소를 버리고 공손찬에게 투항했다고 한다. 공손찬이 내세운 원소의 10개 죄상은 다음과 같다. ||거기장군 원소는 선대에 행적에 기대어 막중하고 숭고한 작위에 있음에도 음란하고 경박하다. * 사예교위였을 때, [[하진(삼국지)|하진]]을 보좌하면서 바른자를 추천하지 않고, 아양 떠는 무법자들이나 불러들이고, [[정원(삼국지)|정원]]에게 명하여 맹진에 방화하였으며 동탁이 반란을 일으킨 때에까지 이르렀다. * 동탁이 천자를 인질로 잡았음에도 도망가기 바빴다. * 동탁을 공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나 군비를 준비하며 자신의 가문인 태부 일문을 버려 인자함이 없고 효행이 없다. * 거병하여 2년이 지났으나, 자신의 이익만 꾀해 백성을 수탈한다. * 기주를 도둑질하고, 멋대로 금과 옥을 깎아 옥새를 만들고 조칙이라고 칭하며 분에 넘치고 위계를 어지럽힌다. * 천문가에게 상서로운 징조를 관측케 하고, 뇌물을 주고, 기일을 받아 군현을 공략, 약탈하고 있다. * [[유훈(후한)|유훈]]과 거병했던 주도자이면서도 원소는 사소한 것에 노하여 그에게 혹형을 가하고 한편, 사악한 자들을 신용하여 그들의 악한 일을 지원하고 있다. * 옛 상곡태수 [[고언]], 옛 감릉국상 [[도공]]은 원소가 그들의 재산을 홀랑 뺏어가려는 것에 저항하여 일부 남겨둔 일로 목숨을 잃었다. * 원소의 어미는 유모출신으로, 본성이 비천한 자였고 부유하게 되었으나 겸양하는 양심은 없다. * 장사태수 [[손견]]은 동탁을 도망시켜 능묘를 깨끗케 하였으며, 왕실에 충성하여 그 공적이 막대했는데 장수를 보내어 그의 관위를 빼앗고, 군량을 끊어 동탁을 오랫동안 주살치 못하게 하였다. 원소의 죄상은 남산의 [[대나무]]를 모두 붓으로 만들어 써도 모자랄 것이다. 과거 [[제환공]]과 [[진문공]]은 적도들의 무례를 밝히 드러냈다. 신은 미천하여 선현과는 비교할 수 없으나 조정의 은혜를 입어 중임을 담당하고, 부월의 직무에 임하여 죄인토벌의 사령을 받들고 있다. 곧 원소를 토벌하려 하는데 이 대사가 성공하여 죄인을 포박하는 때에 이르면, 환공이나 문공과 같이 충성스럽게 봉공하겠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원소가 마침내 192년 1월에 출정한다. 공손찬은 군사의 양, 질, 장비, 보급 모든 면에서 원소를 압도하였으나, 계교에서 벌어진 일대 회전에서 원소군의 선봉장 [[국의]]가 보병방진을 통해 공손찬의 기병을 유인, 교란시켰고 이어진 [[쇠뇌|노]]의 사격을 통해 백마의종을 격파하자 공손찬군은 대패한다. 공손찬은 탁군의 고안으로 달아났고 원소는 부장 [[최거업]]을 보내 공손찬을 추격했으나 공손찬은 거마수에서 최거업의 군사를 대파하고 다시 남진, 각 군현을 공략하면서 평원을 중심으로 청주에 영향력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청주 자사 [[전해]]를 파견하여 제(濟) 땅을 점거시켰다. [[원소(삼국지)|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니 유비와 전해는 동으로 가 제(齊, 청주 제국)에 주둔했다(삼국지 선주전). 그러나 후한서 원소열전과 삼국지 원소전 영웅기 주석에 따르면 바로 이후 공손찬이 192년 겨울[* 자치통감에 따르면 12월.] 용주[* 주석에 따르면 청주 평원군과 기주 발해군의 경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에서 원소와 격돌하여 또다시 크게 패한다. 이 시점에 유비는 연주(兗州) 자사로 공손찬에게 임명된 [[선경(삼국지)|선경]], 서주목 [[도겸(삼국지)|도겸]]과 함께 싸우게 된다. 유비는 자신의 임지인 [[청주(중국)|청주]](靑州) 평원군(平原郡) 고당현(高唐縣)에 주둔하면서 원소와 원소 휘하 군벌인 조조와 싸웠고 패배한다(192년 겨울 삼국지 무제기). 193년 1월. 한편 장안에서 동탁이 죽고 [[이각]] 등이 권세를 잡자 장안 조정에선 태부 [[마일제]]와 태복 [[조기(후한)|조기]]를 관동으로 보내 관동지역의 관리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중재하도록 했다. 불리한 상황이었던 공손찬은 이를 명분삼아 원소에게 화의를 권했고 원소 또한 이를 받아들이면서 원소와 공손찬은 화의를 맺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