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손찬 (문단 편집) === 초기 === 대대로 봉급 2천 석을 받던 태수급의 지위를 가지던 고관의 가문이지만, 모친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적자#s-2]]가 아닌 [[서자#s-1]]로서 차별받았다. 때문에 가문의 작위를 이어받지 못했으며, 문하서좌라는 말단 [[공무원#s-1|관리]]로 관직을 시작했다. 문하서좌는 공문서를 베껴쓰는 관리로 공손찬은 비서역의 말단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에 걸쳐 각 부처의 견해가 종합적으로 수렴, 보고되어야 하는 넓고 포괄적인 태수의 사무를 단 한 차례의 보고만으로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짧게 정리, 요약하면서도 항상 논리정연하며 핵심이 전부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현대에 대입하면 시청 비서실에서 잡무나 보던 9급 공무원이, 3급 공무원인 시장 비서실장 및 부시장 수준으로 전체적인 시정 현황을 면밀하고 정확히 파악하고 즉석에서 완벽한 브리핑이 가능한 수준으로 일을 처리했다고 보면 된다. 고대의 행정체계가 현대보다 훨씬 단순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능력이었고, 여기에 더해 잘생긴 외모에 크고 또렷한 목소리까지 갖췄기 때문에 총명함과 말솜씨, 당당한 태도가 더욱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를 눈여겨본 후태수는 딸 [[후씨]]를 그에게 시집보내 공손찬을 사위로 삼았고 이때부터 공손찬의 인생이 펴기 시작했다. 후태수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s-3]]했으며, 학업을 마친 후에는 군의 계리[* 수도인 낙양으로 가서 해당 군의 군사, 정치, 법률, 행정, 경제, 풍속 등 모든 정책 현안을 종합해 보고하는 관직이다.]를 지냈으나, 이후 [[유기(후한)|유기]]가 [[부패|비리]]에 연좌되어 면직되고 [[뤄양시|낙양]]으로 소환되자, 곧 벼슬을 버리고 낙양으로 가는 내내 병졸로 행세했으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기가 [[삼국지/지명/교주|교주]] 일남군으로 유배되자, 그를 수발하기 위해 그를 따라갔다. 이때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여겨 북망산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비장함에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서 일남으로 유배가 된다는 것은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였다.[* 일남이 어디냐면,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 일대이다. 당시 [[후한]]의 수도 [[낙양]]에서 13,400리나 떨어진 한나라 영토 최남단이자 최악의 변방으로 이 곳으로의 유배는 [[살려는 드릴게|단순히 죽이지만 않을 뿐]]인 최악의 형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배지가 이 곳으로 정해지면 '''유배를 가기 전에 장례를 먼저 치르고 출발했다'''고 한다. 공손찬의 고향은 한나라 북쪽 끝인 오늘날의 [[중국]] [[랴오닝성]] 일대인 [[요서]] 지방인데, 위치도 기후도 완전히 반대인 곳을 전근대 시대에 가려고 했으니, 당연히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따라가려고 했으니 젊은 시절에는 의리가 있었다. 하지만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사면령이 내려지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고, 곧이어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을 지내다가 요동속국의 장사로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